페터 네슬러의 작품에 대한 몇 가지 단상 : 다큐멘터리, 분열되는 것들, 그리고 몽타주 (1)_이도훈

  1. 페터 네슬러와 다큐멘터리

How to Make Glass(Mechanically)  Peter Nestler in collaboration with Zsóka Nestler, Sweden 1970

How to Make Glass(Mechanically) Peter Nestler in collaboration with Zsóka Nestler, Sweden 1970

 페터 네슬러(Peter Nestler)라는 이국적인 이름은 약 15년의 시간을 두고 국내외 영화인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2001년 비엔나국제영화제는 페터 네슬러 회고전을 기획하면서 전체 60편에 가까운 그의 작품 중 약 20편을 상영했다. 이것은 페터 네슬러라는 잃어버린 이름과 그것에 결부된 시간을 찾는 작업의 신호탄과 같았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 영어권 관객들에게 페터 네슬러를 소개하는 행사가 본격적으로 조직된다. 2012년 11월 9일부터 17일까지 런던 주재 독일문화원, 테이트 모던, 쇼룸 워크스테이션 셰필드(Showroom Workstation Sheffield)가 공동으로 주최한 회고전이 있었다. 주목해야 할 또 다른 회고전은 2017년 미국에서 열렸다. 2017년 6월 24일부터 28일까지 링컨 센터, 로버트 플래허티 세미나,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 MUBI, 미국 주재 독일문화원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회고전이 ‘저항의 시선(A Vision of Resistance)’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이 일련의 회고전에서 페터 네슬러는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 하루트무트 비톰스키, 하룬 파로키 등과 함께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중요한 영화감독 중 한 명으로 소개되었다. 1939년 독일 브라이스가우(Breisgau) 출생인 페터 네슬러는 1962년부터 텔레비전 방송국의 지원을 받아 16mm 필름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1966년에 스웨덴으로 이민을 간 다음부터는 자신의 아내인 쇼카 네슬러(Zsóka Nestler)와 공동으로 작업한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특히 스웨덴에서는 텔레비전 방송국의 제작 지원을 받아서 유리, 종이, 철, 인쇄기 등을 ‘사물의 전기(biography of object)’의 방식으로 다루는 교육적인 작품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농촌 지역의 공동체와 산업화된 지역의 공동체에서 나타는 변화를 주의 깊게 다루거나 산업화의 조건과 노동의 조건을 시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로 관찰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노동, 계급, 투쟁, 저항, 역사, 사물, 파시즘, 이주, 환경 등에 관한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다. 혹자는 페터 네슬러가 1960년대 이후에 나타는 시대적 격변을 다루는 사회 참여적인 작품과 함께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부분적으로 혁신하는 작품을 만들었던 것으로 평가한다. 이는 페터 네슬러의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성격이 동시에 감지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페터 네슬러의 작품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는 다큐멘터리와 결부되면서도 동시에 다큐멘터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는 과정을 고려해 볼 수 있다. 2018년 11월 29일 아트선재에서는 페터 네슬러의 <유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수작업으로)(How to Make Glass(Manually))>(1970)와 <유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기계적으로)(How to Make Glass(Mechanically))>(1970)를 상영했다. 이 행사는 서울국제실험영화제EXiS와 아트선재가 공동으로 기획하는 정기 상영회  <PLAY for TODAY>라는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이어서 2019년 7월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과 국립현대미술관의 협력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상영회가 열렸다. 페터 네슬러의 작품 중 11편이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 기간 중에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필름앤비디오의 <디어 시네마>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에 각각 나누어서 상영되었다. 이중 7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상영회 직후에 스웨덴의 영화 잡지 《월든(Walden)》의 편집자 마틴 그린버그(Martin Grennberger)가 참석하는 대담 자리가 있었다. 이 날 행사의 진행을 맡았던 서울국제실험영화제페스티벌 프로그래머 이행준은 페터 네슬러의 상영회를 기획하고 마틴 그린버그를 초청하게 된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실험영화로 분류될 수 있는 작품 중 상당수가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제작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바 있다. 페터 네슬러가 국내에 소개되는 장소와 이행준 프로그래머의 지적을 고려해보자면, 이제 다큐멘터리적인 속성을 가진 영상들은 실험영화, 아방가르드, 미디어 아트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그 모든 곳에 속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현대 영상 언어의 보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반대로 이제 다큐멘터리는 가장 급진적인 영상 언어의 근간을 이룬다는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들은 페터 네슬러의 작품을 포함한 다큐멘터리의 귀환 혹은 그런 작품들이 장소를 불문하고 출현하는 현상들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다큐멘터리가 오늘날의 영상 언어를 위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형식이 되었건 특수하고 예외적인 형식이 되었건 간에 그것은 모든 영화적 영토를 횡단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페터 네슬러의 작품 전편을 볼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부분적으로만 수용해야 하지만, 최소한 그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보고 나면 그의 작품 속에서 다큐멘터리적인 속성에 대한 수정, 개선의 의지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이 글은 페터 네슬러의 영화적 세계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초라한 노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2. 복수의 나와 분열된 우리

페터 네슬러의 첫 번째 작품 <수문에서(At the Floodgate /Am Siel)>(1962)와 그의 두 번째 작품 <에세이(Essays)>(1963)는 불완전한 자아인 ‘나(I)’를 전면에 내세운다. 하나의 총체로 그려지지 않는 모종의 형상을 그려나가는 방식은 이후로도 페터 네슬러가 어떤 사물, 인물, 사건, 역사를 다루건 간에 일관되게 적용하게 될 방법론 중의 하나이다. 

AT THE FLOODGATE(AM SIEL)  PETER NESTLER, Germany 1962

AT THE FLOODGATE(AM SIEL) PETER NESTLER, Germany 1962

 <수문에서>는 선언적으로 자아로서의 ‘나’가 등장한다. 독일 동프리지아(Frisia)의 한 해안가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수로와 수문을 다루고 있는 이 짧은 작품에서 수문은 고유한 정신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의인화된다. 내레이션은 시인이자 작가인 로베르트 볼프강 슈넬(Robert Wolfgang Schnell)이 쓰고 읽었다. 그가 영화 속에서 처음 발화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마을 한쪽 끝에 있는 늙은 수문입니다(I am an old dike sluice with a village at one end).” 이 일인칭 시점의 발화는 영화 내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영화 속에서 수문은 한편으로는 마치 죽은 시체처럼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는 객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처럼 지각, 인지, 판단의 능력을 갖춘 상태에서 자신이 원하면 어디로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주체이다. 그 수문은 마을 사람들과 기억을 공유하면서 때로는 다른 어떤 이들이 애써 잊어버리려고 하는 파시즘에 관한 기억을 들춰낸다. 이처럼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이미지와 텍스트를 나란히 병치시키고, 텍스트의 이야기가 여담(digression)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연출자로서의 저자와 텍스트 생산자로서의 저자를 분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알랭 레네가 1956년에 연출한 <밤과 안개>와 같은 에세이영화와도 유사한 점이 있다. 

그가 두 번째로 만든 <에세이>에서는 자아로서의 나 혹은 저자로서의 나가 분할, 중첩, 통합된다. 이 작품은 등교에서 하교로 이어지는 학교생활을 다루고 있다. 표면적으로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일처럼 보이지만, 정작 이 작품 안에는 여러 명의 화자가 들려주는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교차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눈으로 뒤덮인 언덕과 그 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가옥 한 채가 보인다. 한 아이가 집을 나서 눈밭을 걷는 동안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직접 맡은 그 아이는 계절에 따라서 등굣길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설명한다. 그 다음 자신이 겪은 기묘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아이는 지름길을 통해서 학교를 가던 중 덜커덕 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아보았다가 빨간 머리의 사나이를 봤다고 한다. 이처럼 영화는 다큐멘터리적인 영상을 보여주면서도 당사자의 경험과 주관에 의존한 내레이션을 통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든다. 더불어 영화 전체에 걸쳐 결정적인 순간마다 새로운 화자가 등장하고 그때마다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진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서투르지만 자기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참된 이야기꾼이다. 이를테면, 어떤 아이는 자신이 겪은 기묘하거나 인상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말하고, 또 다른 아이는 ‘그다음에’와 같은 접속사나 ‘이따금’과 같은 부사를 활용해 자신이 겪은 일에 시간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페터 네슬러는 자신이 다루는 대상에게 자율성을 부여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목소리를 아름답게 처리하는 방식,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방식에 신경을 쓴 것 같다는 지적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건 신뢰와 관련이 있습니다. 영화에 출연하는 사람들과의 신뢰라고 할 수 있죠. 나는 항상 영화가 다루고 있는 사람들과 논의를 했고,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데 기여를 했죠. 그건 인터뷰는 아니었어요. 무엇이 중요한 지에 관한 것이었죠. 그리고 그것은 작품의 주제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때로는 올바르게 말하기 위해서 매우 집중해야만 했어요. 그런 방식으로 했다고 해서 거기에 거리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을 신뢰했어요.”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페터 네슬러가 자신의 작품에서 하나의 이상적이고, 단일하고, 총체적인 자아보다는 불안전하고, 복합적이고, 분열된 자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근대성을 상징하는 견고한 것들의 붕괴 또한 페터 네슬러의 작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는 1960년대 중반에서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유럽 일대의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역사, 문화 등을 다루는 교육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그 작품들은 농촌 마을이나 소도시 등지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관찰하면서 파시즘에 맞서 민주화를 이루어내는 투쟁, 농경 사회가 산업 사회로의 이양하거나 산업화된 지역이 경제적으로 침체되는 과정,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문명의 발전사 등을 다루었다. 이러한 주제는 한 지역을 중심으로 장구한 시간 동안 지배적인 체제, 규범, 이념 등이 특정 역사적 국면을 맞이해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다룬다. 페터 네슬러의 이러한 작품들 중 상당수는 지명을 그대로 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작품 목록에는 <오덴발트스테텐(Ödenwaldstetten)>(1964), <루르(Ruhr)>(1964), <그리스로부터(From Greece)>(1965), <라인강(Rhine River)>(1965),  <다뉴브 강을 따라서(Up the Danube)>(1969) <루르 지역에서(In the Ruhr Region)>(1967), <포쉬메르(Fos-sur-Mer)>(1972) 등이 포함될 수 있다. 

 페터 네슬러는 한 지역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에 접근한다. 종종 그의 작품 중 일부는 농촌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수작업에서 기계식 작업으로, 산업 사회에서 소비 사회로 전환하는 과도기적인 단계를 다루고 있다고 평가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부분은 페터 네슬러가 포착하고 있는 역사적 흐름이 급격한 단절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변화를 기록하지만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의 흔적을 부정하거나 지우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의 일부 작품에는 농촌 사회를 대표하는 공동체 중심적인 생활양식과 함께 산업 사회를 대표하는 대도시의 생활양식이 공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1920년대 아방가르드 영화들이 그려냈던 도시의 속도전, 기계 문명에 대한 예찬, 미래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은 페터 네슬러의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페터 네슬러는 맹목적으로 미래를 향해 질주하기보다는 현재를 배회하면서 과거의 흔적과 만나는 데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이와 관련해서 독일 북서부 지역의 공업지대를 일컫는 루르 지역에 관해 만든 두 작품 <루르>와 <루르 지역에서>를 예로 들 수 있다. <루르>의 경우, 19세기 이후부터 독일의 기반 산업이었던 루르 지역의 석탄산업과 철강산업이 서서히 쇠퇴기를 맞이하는 시기와 거의  맞물리는 1964년에 완성한 것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에는 교각을 지나가는 열차, 건설 자재를 운반하는 트럭, 도로 위를 지나다니는 자동차, 도심 곳곳에 위치한 건물들, 호수 위의 오리들의 모습이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이 일련의 이미지들은 속도감 있게 편집되었지만, 정작 그 속도감은 여백의 미가 있는 화면 구성으로 정적인 순간을 담아낸 일련의 이미지들에 의해서 반감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쇠락해가는 공업 지역에서 다양한 계층과 계급들이 어우러져 일상을 보내는 순간들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쇠락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지만, 이 구분은 대립으로 치닫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피한 공존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루르 지역이 산업적으로 번창하고, 전쟁과 냉전에 의한 외교의 격전지가 되고, 종국에는 1970년대를 즈음하여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인해 산업적으로 쇠락하는 그 오랜 시간에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성급한 역사적 판단은 실수와 누락을 유발하고 그렇기 때문에 신중한 역사적 판단은 기약 없이 유예된다. 페터 네슬러는 역사적 변화에 대해서 섣불리 단언하지 않는다. 그는 역사적 격변의 시기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면서도 그로부터 한발 물러선 상태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조사하고, 분석하는 자세를 우선적으로 취한다. 

페터 네슬러는 사회 참여적인 다큐멘터리들이 지향했던 선동적인 방식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특정 대상에 대한 정밀한 관찰에 집중한다. 그가 루르 지역에 관해서 만든 또 다른 작품에 주목해보자. 1967년에 만들어진 <루르 지역에서>라는 작품은 루르 지역의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혹자는 페터 네슬러의 작품 중 ‘분노’가 가장 잘 드러난 경우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실제 작품 속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된 일을 하면서도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걱정하고, 광산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산업 재해로 고통 받거나 그러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투쟁하고, 1920년대 루르 붉은 군단(Ruhr Red Army)에 가담했던 노동자들이 파시즘의 창궐에 맞섰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페터 네슬러는 루르 지역의 여러 노동자들을 인터뷰한 장면들을 엮어나간다. 그러나 그 구성 방식은 이 작품을 보면서 기대할 수 있는 승리의 서사로 연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이 분노, 투쟁, 승리로 이어지는 거대 서사가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루르 지역에서>는 1960년대 루르 지역에서 노동의 조건이 어떠한지에 대한 분석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영웅주의적인 노동자의 전형이나 승리의 서사를 배제한 까닭에 이 작품에서 혁명의 기운은 감지되지 않는다. 이는 1960년대를 즈음한 루르 지역의 역사적 상황을 감안했을 때 보다 설득력을 갖는다. 그 시기의 루르는 일부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노동자 계급이 시스템을 중지시킬 수 있었던 파업의 효력이 감소되고, 파시즘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다음 그것이 현존하는 가운데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적이 아닌  실체 없는 유령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시절의 노동자들은 공통의 적을 상실하고 그들이 스스로 ‘우리’를 외치며 결집할 수 있는 구심점을 잃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파시즘과 전쟁으로 홍역을 치른 이후이기에 앞으로 더 나빠지지는 않겠지만 더 좋아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체념의 정서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앞서 페터 네슬러의 ‘나(I)’가 이상적인 총체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관점을 조금 더 확대 적용해보자면, 페터 네슬러의 작품에서 ‘우리(We)’ 또한 이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의 작품은 분명 나와 우리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희망적이지만, 반대로 그의 작품은 나와 우리에 관한 그 어떠한 이상적인 형상도 도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절망적이다. 단단한 것은 연약해지고, 한 번 연약해진 것은 좀처럼 단단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페터 네슬러는 하나의 이상적인 시간 또한 그리지 않는다. 그는 섣불리 희망을 말하기보다는 그러한 희망의 조건들을 우선적으로 살피려고 한다. 그의 작품에 내일은 없지만 내일을 위한 시간과 장소는 있다. 

EXiSPeter Nestler, 페터 네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