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네슬러의 다큐멘터리에 관하여

참석자 : 마틴 그린버그 진행/사회 : 이행준(EXiS) 통역 : 박재용

일시 및 장소 : 2019년 7월 26일 오후 4시, MMCA필름앤비디오

녹취 및 정리 : 이도훈 


*이 글은 2019년 7월 26일 MMCA필름앤비디오에서 진행된 대담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디어 시네마 : 오래된 이미지, 다른 언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페터 네슬러의 <도대체 왜 전쟁인가?>(1971), <죽음과 악마>(2009)의 상영이 있었으며, 이 상영이 끝난 직후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의 프로그래머 이행준이 사회자로 그리고 《월든(Walden)》의 편집위원이자 영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마틴 그린버그(Martin Grennberger)가 대담자로 참석하는 부대행사가 이어졌다. 녹취록 작성은 현장에서 이루어진 동시통역에 기초했으며 필요에 따라 사회자, 대담자, 관객이 발언한 내용을 크게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수정을 가했다. 


이행준 : 일단 왜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으로, 굉장히 전통적인 의미에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페터 네슬러의 작품을 상영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실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잠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왜 감독님이 아닌 마틴 그린버그 비평가가 이 자리에 왔는지도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 한번 정도라도 오셨던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저희 영화제 경쟁부문에 상영되는 작품 중 대략 90퍼센트 정도는 다큐멘터리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최근 5년 정도의 기간 동안 전통적인 의미의 실험영화들이 더 이상 제작되지 않고 있으며, 많은 작품들이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 일련의 경향에 대해서 영화제 내부에서도 많은 고민을 해왔습니다. 이런 부분을 반영하기 위해 최근 몇 년 동안 다큐멘터리 작품을 많이 소개하려고 노력해왔고, 그 일환으로 페터 네슬러 회고전을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진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옆에 있는 마틴 그린버그 비평가가 페터 네슬러 감독님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오게 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감독님을 초청하기 위해서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정상 감독님이 오시기 힘들게 되었고, 감독님께서는 두 분의 이름을 언급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언급된 이름은 포르투갈 출신으로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필름 큐레이터 리카르도 마토스 카보(Ricardo Matos Cabo)였습니다. 그 다음에 언급된 이름이 마틴 그린버그였습니다. 페터 네슬러 감독님께서는 이 두 사람이 자기를 대신해서 한국에 간다면,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잘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리카르도 마토스 카보는 작년에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바 있습니다. 그는 2000년대 중반에 포르투갈에서는 처음으로 페터 네슬러의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2007년~2009년 사이에 테이트 모던, 링컨 센터, 플래허티 세미나 등을 통해서 페터 네슬러 감독이 소개되면서, 그의 작품이 중요하게 부각되었습니다. 물론 페터 네슬러가 소개될 당시에 그의 작품이 하루트무트 비톰스키나 장 마리 스트라우브 등과의 연결지점이 있었기에 더 부각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틴 그린버그 비평가 같은 경우에는 2012년부터 페터 네슬러에 관한 인터뷰와 비평 작업을 위해 직접 감독님을 만나고 여러 가지 기록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2012년에는 온라인으로 발행되는 《월든(Walden)》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페터 네슬러에 관한 글과 인터뷰를 공개했습니다. 오늘 마틴 그린버그 비평가가 그 잡지를 가지고 왔던데, 2015년에는 앞서 말한 《월든》을 인쇄물로 발행하고 거기에 페터 네슬러 감독의 인터뷰와 관련 글들을 수록했습니다. 오늘은 마틴 그린버그 비평가가 페터 네슬러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설명하는 자리를 가질 예정입니다. 우선 간단하게 본인 소개를 해주시고, 그 다음에 페터 네슬러 감독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 왜 이 분이 독일에서 활동하다가 스웨덴으로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곳에서는 또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설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틴 그린버그 : 안녕하세요, 저는 마틴 그린버그라고 합니다. 저를 이 자리에 초대해주신 국립현대미술관 스태프, 이행준 프로그래머,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스태프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2015년에 발간된 《월든》이라는 잡지를 만든 여러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페터 네슬러 감독을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여기 이 《월든》이라는 잡지의 편집자이고, 영화제 프로그래머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웨덴에 있는 시네마테크에서 2015~2016년 사이에 약 20여 편의 페터 네슬러의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여섯 차례 정도 진행한 바 있습니다. 페터 네슬러는 1937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62년에 자신의 데뷔작을 찍었습니다. 오늘 이 대담 직전에 있었던 프로그램이 아닌 그 전 프로그램의 상영을 보셨다면, 아마 그가 1962년에 데뷔작으로 발표한 <수문에서>를 보셨을 겁니다. 이 작업은 페터 네슬러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한 독일의 과거, 특히 나치와 연관된 과거를 다루는 방식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페터 네슬러는 처음에 [영화 연출을 공부했던 것이 아니라] 뮌헨에 있는 미술학교에 회화 작가가 되기 위해 입학을 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독일의 중공업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배를 타는 선원 생활을 했습니다. 일전에 저와 인터뷰를 했을 때, 그는 배를 타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던 중에 남미에 갔던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페터 네슬러는 과거에 나치로 활동하다가 남미로 도망친 독일인을 만났고, 그가 그곳에서도 여전히 나치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페터 네슬러가 영화감독이 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합니다. 아, 이행준 프로그래머가 제가 잊고 있던 것을 하나 말해주었는데요. 구글 검색창에 페터 네슬러라는 이름과 함께 배우라는 키워드를 같이 넣고 검색하시면 아주 잘 생긴 젊은 남성의 얼굴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페터 네슬러는 1950년대 말, 독일의 여러 멜로드라마에서 주연으로 연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이제 페터 네슬러의 작업과 관련된 맥락을 간단히 말씀드리고, 그가 스웨덴으로 이주하게 된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그가 1962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그 시기에 그의 작품은 독일 텔레비전 프로덕션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유럽 여러 국가에서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실험적이었다고 평가하기에는 어려운 구석이 있지만, 최소한 급진적인 주요 이슈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들을 많이 지원해주었습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그 당시 독일은 페터 네슬러가 작품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 상영을 보셨다면, <수문에서>와 함께 <루르>라는 작품도 보셨을 겁니다. 두 작품의 경우,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참사와 같은 독일의 과거사를 다루기도 하지만, 독일에 공업 생산이 진행되면서 나타난 변화, 그리고 그것이 시골 사람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작업이었습니다. 이행준 프로그래머가 말한 것처럼, 페터 네슬러가 재발견된 시기는 2000년대 중반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현재 MMCA필름앤비디오의 상영 프로그램에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독일에 《필름크리틱(Filmkritik)》이라는 중요한 잡지가 있고, 거기에서 활발히 활동한 비평가들이 하르트무트 비톰스키와 하룬 파로키였습니다. 이 잡지에 글을 썼던 사람들이 페터 네슬러를 소개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월든》이라는 잡지를 만들 때 하룬 파로키, 하르트무트 비톰스키, 장 마리 스트라우브가 [페테 네슬러에 대해] 쓴 글을 번역해서 실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페터 네슬러의 작업에 맥락을 부여해준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하기에 앞서 페터 네슬러의 생애에 관한 정보를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페터 네슬러의 작업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은, 종종 그의 작업에 대해 말하면서도 언급되지 않는, 그의 아내 쇼카 네슬러입니다. 페터 네슬러가 만든 모든 작업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 두 사람은 상당히 많은 작업을 함께 했습니다. 쇼카 네슬러는 주로 사운드 레코더의 역할을 했는데, 특히 그녀는 페터 네슬러의 작품이 사회적인 접점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여했습니다. 쇼카 네슬러는 영화 작업을 하는 도중에 [촬영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페터와 쇼카가 협업한 많은 작품들은 유럽에서 역사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유럽 전체의 인구 중에서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로마인을 다루거나,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의 국경을 오가면서 살고 있는 사미족과 같은 소수민족을 다루었습니다. 쇼카 네슬러는 헝가리 출신이어서 그런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했습니다. 촬영을 할 때 분명 의심의 눈을 갖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그때 쇼카 네슬러가 촬영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다가갔을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사회적 부정(unjustice)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작업에 있어서 필요한 윤리적인 문제에 해당하는, 촬영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방식과 관련된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해주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행준 : 마틴 그린버그 비평가 분께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려고 하는 것 같아서, 그 전에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페터 네슬러는 1962년부터 매년 한 편의 작품을 만들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을 했습니다. 이번에 저희 영화제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이 같이 프로그램을 진행을 했지만, 그 규모가 회고전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작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일련의 작품을 고를 때 기준 같은 것들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저희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작품 중에 <히로시마>, <기다림>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상영하는 작품은 모두 마틴 그린버그 비평가가 골랐습니다. 마틴 그린버그 비평가 분께서는 페터 네슬러의 거의 모든 작품을 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 상영작 선정에 있어서 어떤 기준이나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마틴 그린버그 : 60편 이상이나 되는 작품들 중에서 어떤 상영작을 골라야할지 논의하는 과정에 있어서 어떤 하나의 동일한 주제를 가진 프로그램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작품에서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여드린 작품들을 보면 1962년에 만든 데뷔작을 시작으로 해서 1960년대 중반의 작업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작품들은 어떤 확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변화하고 있는 독일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작품들, 그래서 페터 네슬러의 시작 부분을 보기에 좋은 작업들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페터 네슬러의 작업에 있어서 또 다른 흐름은 에세이필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1965년에 그리스에서 일어난 쿠데타를 촬영한 <그리스에서>라는 작품을 만듭니다. 그리스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사실 독일의 정치를 비판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이 작업은 페터 네슬러의 독일 활동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됩니다. 이 작품을 만든 이후로 [독일에서] 그 어떤 재정적인 지원도 받을 수 없었고, 그래서 한동안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966년에 스웨덴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페터 네슬러가 스웨덴으로 이주한 이유는, 어머니가 스웨덴 사람이었기 때문에 스웨덴으로 가는 것이 편리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웨덴 텔레비전 방송국이라는 틀 안에서 작업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 방송국들이 급진적인 작업에 열려 있었던 것처럼 스웨덴도 급진적인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는 흥미로운 시기였습니다. 페터 네슬러는 작업을 계속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이유 때문에 스웨덴으로 이주를 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었던 <도대체 왜 전쟁인가?>라는 작품의 경우, 스웨덴 텔레비전 방송국을 통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아이디어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이러한 작품들은 텔레비전 방송국의 어린이 부서를 통해서 제작되었습니다. [해당 방송국 측에서는] 어린이, 청소년, 심지어 어른들에게까지도 세상의 어떤 부분에 관심이 있는지 혹은 세상의 어떤 부분에 대해 알고 싶은지를 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 중에 하나가 ‘도대체 왜 전쟁인가?’라는 것이었죠.

페터 네슬러는 1960년대 말부터 1977년까지 아주 다양한 영화를 만듭니다. 그 작품들은 방금 말씀드렸던 텔레비전 방송국의 틀 안에서 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 특히 다양한 생산양식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유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악기가 어떻게 제작되는지, 종이의 역사는 어떤 것인지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페터 네슬러는 삽화, 영화, 책과 같은 다양한 이미지를 활용해서 아주 밀도 높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작업들이 영화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와 관련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이 대담 직전에 이행준 프로그래머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페터 네슬러가 1960년대에서부터 1970년대 초 사이에 만든 작품을 생각해보면, 제게 페터 네슬러는 상당히 정치적인 감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테면, 그는 세계의 부정에 대해 불편함을 가지고 작업을 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고전적인 감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60년대 말에 파리에서는 68혁명이 일어나고, 유럽 전역에 걸쳐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EXiS에서 상영되기도 했지만, 일본에서는 츠지모토 노리아키, 오가와 신스케 같은 감독들이 있었죠. 이들이 영화를 활용해 보여주고자 했던 전투적(militant)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을 페터 네슬러가 따라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페테 네슬러와 이야기했을 때, 그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초창기에 영화 작업을 하면서 몽타주를 위해 그렸던 드로잉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잡지를 보여주면서) 잘 보이지 않으시면 이후에 나오셔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몽타주라는 것에 있어서도, 라틴 아메리카의 영화에서 몽타주라고 하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한 저돌적인 수단이었지만, 페터 네슬러는 1930-50년대 다큐멘터리 영화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장 르느와르의 영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사운드와 영상이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는 영화를 더 선호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960년대 말 무렵 다른 영화감독들에게 있어서 영화 혹은 몽타주라는 것이 무언가를 획득하기 위한 저돌적인 언어였다면, 페터 네슬러 역시 사회에 대한 불만, 불안,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조금 다른 방식을 썼던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부분이 감동적으로 나타나는 사례, 페터 네슬러가 역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가 잘 드러나는 작품은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보신 <죽음과 악마>입니다. 이 작품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그의 어머니도 등장하죠, 그런 내밀한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는 끝 부분에 가서 감독이 말하고 있듯이 그 자신이 침묵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영화가 끝나갈 즈음에 저 뒤쪽에 있는 문을 통해서 상영관 안으로 들어왔는데요. 사실 이미 이 영화를 여러 번 본 상태이지만, 여전히 그 부분이 주는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부분들이 페터 네슬러가 가지고 있는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 등이 잘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프로그래밍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페터 네슬러는 불과 몇 십 년 전에 일어난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나치의 과거에 대한 본인의 가족이나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무능함에 대해 괴로워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아내인 쇼카 네슬러를 만나면서 다른 관점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상영작 중 하나인 <다뉴브 강을 따라서>와 같은 작품이 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만든 지리적 지역 근방에서 만들어진, 이를 테면, 떠돌아다니는 유대인들의 전통이 있는 지역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 있습니다.(주)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쇼카 네슬러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쇼카 네슬러는 심리상담을 공부한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일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페터 네슬러가 스웨덴 텔레비전의 지원을 받아 만든 작품 중에는 이주민에 관한 것이 꽤 있습니다. 스웨덴은 유럽에서 최초로 다른 나라 사람들을 큰 규모로 받아들인 국가입니다. 왜냐하면 스웨덴은 인구가 적고 산업을 위해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칠레, 남유럽, 그리스, 알바니아, 터키에서 온 사람들이 스웨덴을 새로운 나라로 재건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런 이주민들에 대해 페터 네슬러는 부드러운 시선을 갖고서 작업을 했습니다. 그 작품들을 보면, 요즘 스웨덴 사람들은 예전에 비해 이주민들에게 덜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분명 유럽에서 일어난 인구 이동의 중요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페터 네슬러가 1960년대에 텔레비전 방송국의 지원을 받아 만든 작업들은 16mm 필름으로 촬영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뉴브 강을 따라서>의 경우, 메타크롬 필름으로 촬영했기 때문에 색상이 아주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페터 네슬러의 작업과 관련해서 이런 부분이 자주 언급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다큐멘터리 이미지의 물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복잡한 몽타주를 활용하기보다는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이미지를 구축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아주 상세하게 말씀드리기는 힘들지만, 특히 메타크롬 필름을 활용해서 컬러로 찍은 작품을 많이 만들기 힘들었지만, 실제로 페터 네슬러가 그런 식으로 촬영을 했을 때 색상이나 필름의 결에 대한 그의 탁원할 감각으로 인해서 미학적으로도 훌륭한 결과물을 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죽음과 악마>와 같은 작품을 보면 스틸 이미지를 매우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무빙 이미지가 들어간 시퀀스는 몇 개 없고 거의 대부분이 사진 아카이브에서 얻은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다림>(1985)이라는 작업의 경우, 스웨덴 라디오 아카이브에서 버려질 뻔한 사진 자료들을 찾아서, 말하자면 그런 이미지들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시킨 것들을 통해서 독일의 [실레시아] 광산에서 일어난 붕괴사고에 대한 것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 마틴 그린버그가 어떤 작품인지 명시저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페터 네슬러가 나치 점령기에 독일을 탈출한 유대인 화가를 다룬 <Flucht>(2000), 유년기에 나치 수용소를 탈출한 한 남성의 관한 이야기를 다룬 <Die Verwandlung des guten Nachbarn>(2002) 등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행준 : 지금까지 페터 네슬러에 대해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 그럼 객석으로 마이크를 넘겨서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관객 1 : 저는 어제 개막식에도 참석을 했었는데요. 오늘 상영된 [<죽음과 악마>]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죽음과 악마>에 나오는 곰이나 토끼를 사냥하는, 트로피 헌팅에 대해서 마틴 그린버그님 비평가와 이행준 프로그래머 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한 에릭 폰 로젠 백작에 대한 것도 궁금합니다.

마틴 :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당 영화에 사용된 사진들은 페터 네슬러의 외할아버지의 사진 아카이브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말하자면, 감독의 가족이 남긴 스틸 이미지이고 그것들을 보게 되면 나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괴링이나 나치 세력들과 페터 네슬러 가족의 직접적인 연결을 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를 여행하거나 그곳에서 사냥을 하는 것들은 부르주아 계급 문화였습니다. 지적해주신 [트로피 헌팅에 관한] 부분은 그런 문화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페터 네슬러가 그런 것들을 보여주려고 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 또한 그런 것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서 싫어했으며, 그것들이 얼마나 나쁜 것이며, 특히 가족사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얼마나 괴롭게 하는 것인지, 그것들을 본인 스스로 완벽하게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이미지들을 삽입했다고 생각합니다. 짧게나마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한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페터 네슬러의 작업 윤리이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작업을 보면 아주 큰 목소리로 왜 본인이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정제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본인이 속한 국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건 그도 아니면 본인이 속한 국가가 사람들에게 나쁘게 대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건 간에 그는 큰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거나 플래카드를 써서 보여주는 식으로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행준 : 제 의견도 물어봐주셨는데, 저는 오늘 진행자로 참석을 했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또 다른 질문 있으신가요. 

관객 2 : 페터 네슬러가 사회 주변부에 대해서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마틴 그린버그 비평가 분께서 어떻게 페터 네슬러에게 관심을 갖게 되셨고, 어떻게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되셨는지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또, 페터 네슬러의 작업들을 보면 앞서 충격적이라고 했던 그러한 것들을 수동적이면서도 공격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독 본인이 어떤 부분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관객이 충격을 받게 하는 식으로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페터 네슬러가 자신의 작업을 본 관객들이 스스로 생각을 바꾸거나 행동을 바꾸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궁금합니다. 

마틴 : 세 개의 복잡한 질문을 주셨는데,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대담 시작 부분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페터 네슬러와 인터뷰를 진행할 때 그는 자신이 1937년에 내어났기 때문에 전쟁 중에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고,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젊은 시절에 펍에 가서 사람들이 농담처럼 던지를 말을 들어보면 여전히 나치주의라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고, 바로 그 부분이 그에게 평생에 걸친 고민을 안겨주었고, 그는 그것을 예술이나 영화 작업으로 풀어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페터 네슬러가 소수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짤막하게 말씀드리자면, 사실 많은 영화감독이나 사진가들이 항상 역사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터 네슬러의 경우, 독일의 상황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일은 유럽 내에서 지리적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족이나 동유럽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오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아내인 쇼카 네슬러가 헝가리 출신인데요, 헝가리라는 나라는 파시즘이 아주 강하게 존재하는 곳이면서도 유대인, 로마족 같은 소수민족들이 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페터 네슬러는 독일 역사를 마주하면서부터 그리고 그것이 다시 개인적인 사안들로 이어지면서 소수자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페터 네슬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과정에 대해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페터 네슬러의 작업은 그에 관한 글을 쓰거나 그의 작품을 소개하기 전에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아니고 해외에서 열리는 영화제 같은 곳에서 부분적으로 그의 작업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까이에 있는 영화감독임에도 그의 작업을 아무도 모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잡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잡지는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페터 네슬러가 만든 아주 강력한 작업에 대한 보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가 만든 영화들의 톤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그가 만든 영화들 안에서 어떤 시간을 초월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잡지는 만든다는 것은 역사에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맹점이 존재할 때 그것을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그것은 잡지를 만들기 위한 좋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웨덴의 맥락을 조금 말씀드리자면, 《월든》이라고 하는 이 잡지는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역사에서 지워질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경우, 그의 몇 주기를 맞이해서 10권 정도의 책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적이 있습니다. 저희 잡지에서 다루는 감독들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역사에 다시 써 넣어야 하는 사람들을 잡지를 통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카이브 작업을 상당히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저희 잡지에서 만나는 많은 감독들의 경우 이미 80대 중반에 접어든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페터 네슬러 같은 경우 국제적으로는 이 감독에 대해 관심을 갖는 관객이 어느 정도 있지만, 여전히 그와 관련해서 해야 할 작업이 많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페터 네슬러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그의 여러 작업들이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잘못된 대우를 받았는지 혹은 어떤 것이 잘못되었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그것을 열어 놓는 부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테면, 강력한 정치적인 아젠다를 품고 있는 예전 영화들을 지금 보면 상당히 낡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1968년 혁명을 다룬 많은 영화들이 관객들의 눈앞에 뭔가를 직접적으로 던지는 것처럼 만들어졌다면, 제 생각에 페터 네슬러의 작업은 여전히 새로운 관객을 찾을 수 있고, 여전히 역사를 다르게 볼 수 있게 하는 열린 작업에 가깝습니다. 질문자 분께서 페터 네슬러의 작업에 대해 수동-공격적이라는 표현을 써주셨는데요. 제 생각에 페터 네슬러의 작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지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이행준 : 마틴 그린버그 비평가의 역사에 대한 허기를 표출할 수 있는 좋은 질문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시간 관계상 마무리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한 가지만 홍보를 하자면, 오늘 페터 네슬러 때문에 이 자리에서 여러 말씀을 해주셨지만, 사실 마틴 그린버그는 스웨덴 실험영화의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프로그램이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서 다음 주 상영이 있습니다. 한국 현대 미술의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폰투스 훌텐(Pontus Hultèn)의 작품을 포함해 굉장히 중요한 스웨덴 실험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상영되니 시간이 되시면 꼭 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마틴 그린버그 비평가의 소감을 듣고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틴 그린버그 : 많은 분들이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을 보고 매우 기뻤습니다. 페터 네슬러의 작품이 상영된다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지만, 오늘 영화관 뒤쪽으로 들어왔을 때 스크린과 마주하고 사운드를 들었을 때 이 작품이 어떤 강력한 틀 안에서 보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페테 네슬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이 제게 여전히 공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페터 네슬러의 작품을 보면서 복잡한 생각을 품고 여러 가지 영감을 얻어가는 경험이 되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