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된 영화,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사이에서

박만우

이 글은 필자가 10년 전에 기고한 〈영화적 세계관과 영상언어의 프락시스〉(월간미술 2000년)의 후속이지만 블록버스터 영화의 용어를 빌리자면, 시퀄(sequel)이면서 동시에 프리퀄(prequel)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프리퀄은 속편의 시간적 배경이 오리지널 영화 스토리의 시간적 배경보다 더 앞의 내용을 다룬 영화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 글은 지난 10년간 영화가 동시대미술의 영역 내부에서 어떤 위상 변화를 경험했고 또한 그 자신 어떤 새로운 영토 확장을 성취했는지를 살펴볼 것이고 아울러 2000년 이전으로 돌아가 영화뿐 아니라 미술 내부에서도 현재와 같은 이러한 󰡐확장된 영화󰡑의 가능성과 그 조건이 탐구되고 있었음을 강조할 것이다.


최근에는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미술작가들의 영화도 많지만 아예 극장에서 상영되는 미술작가들의 영화도 적지 않다. 사실 이제는 아예 상영관 혹은 전시실의 구분을 떠나서 미술작가들이 창작한 영화를 통틀어 "아티스트 필름"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2010), 〈열대병〉(2004), 필립 파레노와 더글러스 고든의 〈지단, 21세기 초상)(2006) 그리고 스티브 매퀸의 〈헝거〉(2006) 등은 상영시간, 제작 및 배급방식에서는 일반 장편영화(feature film)와 다를 바 없다. 시네필에 다소 경멸조로 "미술관 영화"라고도 불리는 이런 아티스트 시네마는 양적으로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여서 국외의 로카르노 영화제, 로테르담 영화제 등은 물론 국내의 전주국제영화제 등에서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을 정도이다. 대개 35mm, 16mm 아니면 HD 카메라로 촬영된 이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상영되기도 하지만 미술관에서 멀티스크린을 통한 설치미술의 형태로 '전시'되기도 한다. 이런 현상 때문에 기존의 비디오아트와 아티스트 필름의 차이는 무엇인지, 그리고 아티스트 시네마의 영화적 특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적 규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먼저 "아티스트 필름"과 "비디오아트"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자. 비디오아트는 텔레비전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들의 관심사는 텔레비전 수상기가 그림의 타블로를 어떻게 대체할 수 있는가에 있었고 그들은 궁극적으로 움직이는 이미지로서 비디오아트는 회화의 지위를 찬탈할 수 있거나 혹은 그 지위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10년 전의 기고문 〈영화적 세계관과 영상언어의 프락시스〉에서 필자가 지적한 "홈비디오 세대"작가들의 영화재활용(film recycling) 작업과 그 이후의 아티스트 필름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더글러스 고든과 피에르 위그 등을 주축으로 한 영화재활용 작업을 특징으로 하는 비디오 작품들은 아티스트 필름과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성의 차원에서 파악해야 한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그들에게 비디오는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따름이었다. 즉 그들에게 비디오라는 매체의 자율성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이 세대 작가들에게 비디오는 동시대미술과 영화를 종합하여 확장된 영화로 나아가기 위한 그 전 단계에서 영화를 분석하기 위한 방법론적 매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비디오는 영화 이미지를 재활용(recycling)하기 위한 수단이지 이미지 자체를 재생(reproduction)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 결과 이들은 자신들의 동영상 이미지를 프로젝션하기 위해 평면모니터를 사용하거나 빔 프로젝터와 벽면스크린을 사용하는 일은 단지 설치미술의 관점에서 선택사항일 뿐이었다.

다음으로 아티스트 필름을 실험영화 전통과의 상관성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험영화는 경제적 차원에서 상업영화를 거부하며 미학적 차원에서는 셀룰로이드로 된 영화의 네거티브 필름 위에 직접 손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기 드보르가 1952년 제작한 〈사드를 위한 울부짖음(Howls for Sade)〉을 시작으로 마이클 스노, 스탠 브래키지 등을 거쳐 최근 핍 초도로프(Pip Chodorov)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일관되게 영화에 대한 저항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보한다. 이에 반해 확장된 영화의 기원을 영화사 내부에서 찾는다면 오히려 앤디 워홀의 영화나 누벨바그 감독들 그리고 마그리트 뒤라스의 영화나 크리스 마커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위에서 아티스트 필름의 차별성을 발생적 맥락에서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아티스트 시네마의 특수성을 이들이 추구하는 '동영상(moving image)'의 내재적 성격을 통해 조명한다. 우선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면, 샹탈 애커만, 피에르 위그 그리고 샤를 드 모 등 작가들의 영화는 제작과정에 시나리오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프랑스의 영화창작지원기관인 국립영화센터(Centre National du Film)에서는 시나리오가 없으면 영화로 간주될 수 없으므로 이들 영화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이다. 기존 영화의 관점에서 보면 아티스트 필름은 무엇 하나가 '부족한' 영화인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아티스트 필름의 전개를 관찰해 보면 이 영화의 확장된 영역은 그 '제반 분과를 가로지르는(transdisciplinary)' 성격에 의해서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이런 영화들은 시나리오가 없는 대신 시와 소설과 같은 문학 장르들과 새로운 접점을 모색하며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차원을 자유롭게 넘나든다(아이작 줄리언, 로드니 그레이엄). 사진은 단순히 촬영과정을 기록하는 '메이킹' 사진이  아니라 촬영의 개별 샷(shot)이 독자적 사진의 위상을 획득하기도 한다. 때로는 하나의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영화를 만들거나 아니면 아예 동영상 영화를 만드는 대신 슬라이드 프로젝션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극단적인 사례지만 일종의 아티스트 필름을 위한 '글쓰기의 영도(zero degree of writing)'라고 간주된다(매튜 버킹엄, 마크 루이스). 텔레비전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매체인데 스포츠 중계나 리얼리티 쇼에서 제공하는 시청자들의 영상 이미지 지각방식을 해체·재구성하는 차원에서 즐겨 다루어진다(롤랑 그라소, 더글러스 고든/필립 파레노). 퍼포먼스가 빈번히 도입되는 것은 물론이고 촬영장소의 건물이나 건축적 구조물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가 건축적 언어로 재약호화 되기도 한다(태시타 딘, 사라 모리스, 피에르 위그,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에스터). 그 외에도 폐쇄된 종교집단이나 기업인들 또는 군인들을 민족지학자의 시선으로 접근하는 다큐멘터리 방식을 도입하기도 한다(요하임 코에스터, 하룬 파로키). 따라서 아티스트 필름의 창작과정에 수반되는 이러한 다양한 매체들과의 융합은 결과물로서 영화만이 아니라 전시장 안에 책, 조각, 드로잉, 회화, 설치 및 음악과 같은 다양한 매체들의 형태를 갖춘 '부산물'들이 함께 디스플레이 되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티스트 필름의 동영상은 영화라는 매체의 특수성(medium specificity)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매체의 통합성 또는 복수 매체들로 이루어진 구축주의의 산물로 파악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매체 혹은 여러 예술 영역 간의 대화는 비단 동시대미술뿐 아니라 심지어는 20세기 미술 전체를 아우르는 특성이다. 20세기 초 예컨대 음향을 가지고 작업하기 시작한 작가들은 음악 창작 산물의 형식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다. 다다이즘을 비롯하여 쿠르트 슈비터즈와 미래주의 작가들은 음향, 텍스트 그리고 이미지들을 서로 소통시키려 했다. 이러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전통은 1960년대 네오 아방가르드로 '귀환'하여 미술의 마르셀 브로타스, 영화의 장 뤽 고다르 등에 의해 되살아났다. 아티스트 필름의 '초매체적' 혹은 매체 통합적 성격은 이러한 전통의 유산에 기인한다.


아티스트 필름, 미술관 입성 

전시의 역사를 통해 보자면 이러한 아티스트 필름이 본격적으로 공인된 전시는 하랄드 제만이 기획한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였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아톰 에고얀, 안리 살라 그리고 샹탈 애커만 등은 충격적인 영상작품들을 선보였다. 마치 영화의 탄생부터 영화를 겨냥한 미술의 의혹을 종식시켜줄 결정타 같아보였다. 이 전시에서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도 선보였고 프랑스의 마랭 카미츠(Marin Karmitz)는 그가 1966년 사무엘 베케트와 같이 제작한 영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영화감독들이 상영관을 벗어나 미술관 전시실에 입성하기 시작한 이후 10년이 채 안되어 하랄드 제만은 이 전시에 참여한 영화 작가들이 보여준 일련의 예술전략들을 하나의 '인식론적 단절'로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제만 자신이 1969년 기획한 〈태도가 형식이 될 때〉에서 개념미술의 탈 물질화 성향을 전시의 개념 축으로 삼았던 사실에 견주어 볼 만한 사실이다. 

미술관에 '전시'되는 영화가 보여준 인식론적 단절은 영화 내레이션의 사실주의적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형식의 내레이션 방식과 시간성을 발견 해야만 했던 이유는 일단 미술관에 들어온 이상 전시라는 틀이 부과하는 기본 조건들을 수용해야 했던 불가피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들의 영화가 앞으로 비디오 설치 또는 필름 설치의 차원으로 발전하는 계기는 그들이 미술관에 입성하는 그 순간 이미 주어졌던 것이다.

실제로 영화감독들은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는 도중 관객이 조급히 나가는 사실에 매우 신경을 쓴다. 그런데 미술관 안에 설치된 블랙박스 안에서는 관람객들이 들어왔다간 잠시 머물지도 않고 바로 나갈 수도 있고 또한 관람객이 들어 온 순간 영화를 되감고 있는 동안이라 참을성 없는 관객들을 붙잡기도 어렵다. 게다가 상영시간의 시작과 끝이 일정하지 않아 관객들은 거의 대부분 이미 상영되고 있는 영화의 중간부터 볼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여건도 수용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이 취한 인식론적 단절의 전략은 복수 시간성의(multi-temporal) 작품을 설치하는 일로 귀결되었다. 이는 여러 개의 프로젝션 스크린을 설치함으로써 관람객의 존재론적 응시를 '좌절'시키는 전략이다. 전통적으로 영화의 관람객은 영상이미지 지각의 주체로서 자신의 신체성에 기인하는 시공간의 경험적 한계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철저하게 계산된 공간연출에 따라 미술관의 블랙박스 안에 설치된 복수의 스크린들은 자신의 신체뿐 아니라 설치공간에 대한 '분절된' 지각 경험을 획득하게 된다. 

가장 일반적인 존재론적 응시 해체의 전략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상이미지를 바라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게 해주는 일이다. 앤디 워홀부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잠자는 모습을 촬영하는 일에 집착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빌 비올라 역시 그의 비디오 작업을 통해 정지화면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던 점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안리 살라의 〈교회에서 잠자는 남자〉 역시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는 남자가 반복적으로 몸을 기우뚱하는 장면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의 경과를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대한 자각은 극장에서 상영되는 피처필름 형식의 아티스트 필름에서도 주요 예술전략으로 적용된다. 태국의 작가이자 영화감독 아피차퐁 위라세타쿤의 작품 〈열대병〉이 좋은 사례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실시간으로 등장인물들의 삶의 일화를 따라간다. 비직업적인 배우들과 찍은 이 영화는 숲속에서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표류가 일정한 간격으로 시간의 흐름을 측정하게 해주는 단서들과 흔적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진행된다. 그의 이전 영화 〈친애하는 당신〉(2003)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정글에서, 바로 그 세계의 어느 한 지점에서 바라본 시선에 의해 행복한 순간을 만나게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영화는 2004년 부산비엔날레 〈영화욕망〉 섹션에 참가한 아피차퐁 위라세타쿤의 비디오 설치작업을 통해 다른 형태로 번역될 수 있었다. 크게 둘로 분리된 비디오 스크린은 매우 독특한 건축적 구조물들로 지탱되고 있어 관객들은 흔치 않은 신체적, 시지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태국의 민담이나 전설 그리고 만화 및 텔레비전 연속극 등의 대중문화 코드들에서 많은 요소를 차용하고 있다는 것을 이런 비디오 설치작업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필립 파레노와 더글러스 고든이 공동으로 감독한 영화 〈지단, 21세기의 초상〉은 아티스트 필름에 고유한 또 다른 차원의 예술전략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형식면에서는 스포츠 다큐이고 장르상으로는 스포츠 영화이다. 스페인 챔피언십 정규게임을 90분 실시간으로 촬영한 이 영화에서 축구 영웅 지단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동시에 카메라는 그가 내면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잡아내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스포츠 중계 카메라는 선수보다 게임을 우선시 한다. 축구 경기 중계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선수들의 발과 공 사이의 상상의 구역일 것이다. 다시 말해 게임의 전술이나 집단적 측면 그리고 지적인 행위 등은 카메라의 관심 밖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단, 21세기의 초상〉에서 경기장 주변에 설치된 17대의 카메라를 통해 관객들은 마치 지단과 더불어 자신이 일부인 경기와 관중을 바라보는 생생한 느낌을 획득한다. 이 영화의 관객은 지단의 시청각 지각과 더불어 관중석과 스펙터클을 관조하는 듯한 지단의 시선을 공유하게 된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정상적인 스포츠 관람의 시점을 완전히 역전시킨다. 관객들이 이 영화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국내에도 이런 해외작가들의 아티스트 필름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유입되었다. 2004년 부산비엔날레 현대미술전을 통해 아이작 줄리언의 영화 〈볼티모어〉가 비디오 설치의 형태로 소개되었고 그 외에도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와 앙주 레치아의 공동작 〈골드〉(2001)를 비롯해서 오머 파스트, 크리스텔 레뢰, 양푸둥, 다이맨터스 나르케비치우스 등의 영화 작품들이 선보였다. 비교적 최근에는 2007년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최된 플랫폼 전시에서 피에르 위그의 〈없었던 여행〉(2005)이 소개되었다. 이외에도 전주국제영화제나 각종 독립영화제 등을 통해 국내에서 아티스트 필름을 접할 기회가 간혹 있었고 2008년 인사미술공간에서는 〈씨네마틱 무빙 이미지의 확장: 아티스트 필름 & 비디오 쇼케이스〉란 타이틀로 일련의 강좌와 토론회 그리고 스크리닝 쇼 등으로 구성된 일종의 퍼블릭 프로그램으로서 아티스트 필름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는 행사도 있었다. 그 외에 2008년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스티브 매퀸의 영화 〈그레이브센드〉(2007)의 아이작 줄리언의 〈웨스턴유니언: 작은 배〉(2007)가 선보였다. 원래 〈웨스턴유니언〉은 3개의 스크린 영화설치 작품이었는데 광주비엔날레에서는 5개의 스크린 영화설치로 규모를 키웠고 사운드 역시 6.1채널 스피커 시스템을 채택하여 영화설치로서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작업을 선보였다. 아이작 줄리언의 사례에서 보듯이 아티스트 필름이 미술관으로 성공적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하이테크놀로지의 디지털 시청각 장비 기술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앞서 1980년대 홈비디오 세대의 작가들이 영화를 분석하고 해체하며 영화재활용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성능이 우수한 VCR 재생장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가의 장비나 영화설치와 관련된 기술력이 걸림돌이 되어서 한국 미술계에 아티스트 필름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태국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경우 그가 채택하는 테크놀로지 정도는 한국 미디어아트 전시에서 늘 볼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아직 국내의 아티스트 필름은 박찬경의 〈신도안〉(2008),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2010), 임민욱의 〈손의 무게〉(2010), 정연두의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2007), 〈공중정원〉(2009), 〈씨네매지션〉(2009) 그리고 함양아의 〈보이지 않는 옷〉(2008) 등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 플레이 리스트가 너무 짧다. 여전히 열악한 비디오아트의 제작환경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이쯤 되면 실험영화나 소위 예술영화의 전통이 거의 전무한 국내의 영상문화 환경 전반에 대해서 한탄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영화로 탈주하려는 국내 미술작가들의 욕망이 스티브 매퀸의 〈헝거〉(2008)와 같은 작품으로 실현되자면 아직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HANGJU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