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보르스키 포인트Zeboriskie Point> 박병래 인터뷰

Q: 이번 작품과 관련해서 전반적인 배경과 이전 작업과의 차이가 있다면 무엇인가?
박: 이번 <째보르스키 포인트Zeboriskie Point>는 기존의 작품들과 전환되는 지점이 있다. 이는 먼저 개인의 기억이냐 집단의 기억이냐의 차이에 있다. 항상 내 작업의 시작은 공간과 개인의 관계이다. 이를 시각적 이미지로 풀어가는 것에 대해 흥미를 느낀 건 개인이 기억하고 있는 유년기 자신의 공간에 대한 것 때문이다. 공간을 기억하고 있는 주관적이고 유일한 이미지를 나의 시각이미지로 바꾸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하다 내 공간을 찾다보니 내 유년기의 공간으로 가게 되고 그 공터에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때부터는 그 공터라는 장소를 가지고 어떻게 시각적으로 이야기를 만들 것인가, 그래서 내가 다루고 있는 비디오를 통해서 어떻게 재구성을 할 것인가 주된 키워드였고, 2011년에 군산을 방문하여 이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이 때 군산 프로젝트를 통해서 인문학자들이 군산에서 근대 문화에 공간들에 대한 설명을 듣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군산이라는 도시를 읽으면서 느낀 것들이 내게는 좋게 와 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느낌이 근대화 과정에서 군산이라는 도시가 소외되었다는 것에서 나오는 불만과 피해의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 같은 관점을 통해서 한국 사회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내 관점에서는 한국사회의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그 지역의 살고 있는 사람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나 시의 정책과 같은 큰 제도적 정책을 통해 공간이 재배치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와 같은 부조화 때문에 고민하다 개인의 기억 속에 있는 유일한 공간을 찾다보니 조금 더 작은 공간을 찾게 되었고, 이름이 독특한 째보 선착장에 궁금증이 생겼다. 째보는 어릴 때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붙어 있는 이름이라 왜 지명에 붙어 있는가에 대해서 궁금했는데, 그곳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째보라고 불렀다고 한다.1) 
그래서 이에 영감을 얻어 째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서 어떻게 하면 인문학자나 시각예술가가 조사화 되어 있는 군산이라는 도시공간을 읽을 수 있을까 싶어 이야기를 만들게 되었다. 말도 안 되는 탐사 속에서 내가 본 풍경을 넣고자 했다. 각기 다른 네 곳의 군산의 과거와 현재로 설정하고 째보가 탐사를 하는 것인데, 반드시 군산이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의 변화하고 있는 공간에 대해서 다루고자 했다. 

 

Q: 지방의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창작 레지던시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고, 이와 관련지어 지역의 특수한 역사나 공간, 재개발등에 대한 영상작업이 많다. 여기 중에서 특이하게 눈여겨본 작품이 있는가?

박: 작품들을 많이 보는 편은 아니다. 그 중 많이 보는 것은 작가의 행위에 관심이 많다. 어떤 관점에서 작품을 다루고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어떤 장르이든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얼마만큼 생활과 맞닿아 있는 지에 대해서이다. 단순히 삶을 영위하기 위한 작가들에게는 교감을 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이 새로운 지역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지금의 30~40대 예술가에게 비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70년대나 80년대가 아니기에 당연히 작업을 하는 촉수가 한국 사회의 지역과 공간으로 향할 것이다. 

 Q: 그 당시 군산에서 머물렀던 것은 작가 입주 프로그램이었는가?
박: 맞다 그 당시에 처음 생겼던 레지던스였다. 그 곳은 일제 시대 당시에 일본인들이 살던 주택이었다. 벽산가옥이라고 불렸던 곳인데, 그곳을 개조해서 썼다. 그런데 이 작품은 거기서 작업한 건 아니다. 거기선 이미지와 원형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1년 이후에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걸 가지고 다시 내려가서 레지던스를 기획하던 사람과 군산을 돌면서 촬영했다. 그 작업 와중에 그 레지던스가 다 없어졌고 관광지로 변해 있었다.

Q: 그럼 혹시 당시에 참여했던 작가나 기획자와 작업이외의 것에서 군산이라는 도시에 대한 다른 관점이나 발견한 것이나 이야기한 것들이 있는가?
박: 내가 있던 곳 말고도 다른 레지던스가 있어서 젊은 작가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몇몇 작가는 옥상이라는 전시를 참여하고 있는 작가도 있다. 이후에 몇몇 다른 작가들은 동강프로젝트랄지 다른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아직은 정리되지 않고 이리저리 작업만 이뤄진 것 같지만, 몇 년 후에는 여기에 대해서 정리하고 그 의미에 대해 성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Q: 보통 작업할 때 작품의 리퍼런스나 이미지 리서치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박: 일단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그냥 아무것도 없이 돌아다니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진을 찍는 편이다. 그것들을 보고 생각하다 키워드가 나오면 작업을 하는 연장선으로 붙이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매번 작업을 마치고 그 다음 작업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마친 작업의 한계와 과제를 성찰한다. 

Q: 아까 말한 것 중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행위라는 단어인데, 최근에 여러 작품의 경향을 보면 정보량이 많은 텍스트와 이미지를 많이 쓰는데, 작가님의 작품에는 텍스트가 없고 콘텍스트가 적다. 행위에 많은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박: 함축된 이미지에 관심이 많다. 키워드나 작은 단어를 함유할 수 있는 공간과 이미지를 찾는 것이 주요한 작업이고, 행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내러티브나 텍스트를 아래에 까는 건 그 작업을 방해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작가가 작품을 내놓으면 작가 소유할 수 있는 선을 벗어나고 관객이 자율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데, 텍스트는 이를 많이 방해하는 것 같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대사나 텍스트를 배제하다보니 제스쳐나 표정이 많이 남더라. 행위는 학부 시절 회화과였지만 행위예술을 많이 했었는데, 그 당시에 만족스럽지 않았던 부분을 지금 하고 있다. 기록을 한다든지, 시간을 조작해 이야기를 만든다던지 것들 말이다.


Q: 째보 작업 때, 중요한 사진과 키워드는 무엇이었는가?
박: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1층 걸려있던 뽈 사진이었다. 그걸 보며 째보는 이렇게 만들어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공간에 버려진 쓰레기와 장식, 50~60년이 흐른 쓰레기와 장식이 혼재된 위태로운 상황,  한 공간이 내포하고 있는 시간의 궤적과 불안정함에 대해서 이번 작업에서 키워드로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째보리스키란느 제목을 갖는데도 대해서도 영향을 미쳤는데, 안토니오니의 자브라스키 포인트(Zabriskie Point)의 젊은이와 오버랩이 됐다

Q: 이 작품에서 잣치기 같은 행위는 어떻게 맵핑이 되는가?
박: 그 부분은 강박 같지만, 처음에는 어린 시절의 놀이가 작업의 흥미를 주어서, 놀이와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놀이와 공간이 하나의 형식화가 돼서 이번에는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데이터를 전송하는 방식에서 놀이를 넣었으면 좋을 것 같았고, 어차피 그 공간을 읽는데 살이 많이 붙은 시간은 내가 경험했던 70~80년대여서 다음 요소로 넘어가기 위해선 잣치기가 필요했다. 대부분 내 작품들 소품이 어설프고 이번 작품에 삽입된 잣치기도 날 것 같은 느낌인데 무언가를 보내는 전송의 시스템이 진짜 같은 느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Zeboriskie Point>(2011)

Q: 전에도 이야기 했었는데, 작품의 콘셉트를 잡고, 구성하고 캐릭터를 설정하고 프로덕션 디자인등의 영화적인 구성을 할 때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번 작업을 통해 남은 것이 무엇인가? 
박: 이번 작품에선 협업을 하는 과정에서 형식이 좀 갖춰졌다. 예전에는 즉흥적으로 주변에서 작업했는데, 이번엔 각 분야에 전문적인 인원들을 컨택 해서 작품에 대한 이미지를 설명하면서 작업했다. 그 사람의 전문분야에서 그 사람의 전문적인 분야에서 이미지를 스스로 끌어낼 수 있게 노력했다. 실제로 작업 방법도 시나리오나 스토리보드도 50%만 미리 준비를 하고 나머지 다른 인원과 고민하며 작업했다.

Q: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에서 스탭을 썼는가?
박: 아직 촬영이나 스틸 이미지 스텝은 때에 따라 스케줄에 맞는 이들과 작업하고, 의상, 디자인, 기획을 진행과정에서 진행요원에 스탭이 있었고, 그 과정마다 프리젠테이션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욕심은 그 과정마다 나오는 결과물을 형식적으로 프레젠테이션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Q: 영화보다 스탭이 부각되지 않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박: 형식적으로 내 작업만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금전적인 보상을 못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자고 한다. 그렇기에 스탭을 넣을 수 있는 자리에 넣고자 한다.

Q: 외적으론 협업을 형식화했고, 내면적으로 남겨둔 과제는 무엇인가?
박; 크게 변환되었던 집단이 남겨둔 장소에 특별함에 대해선, 한 개인이 사회를 읽기엔 역부족이 있었고, 학자가 아니기에 그 공간을 주관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고, 한 작가가 읽은 것이 독자적인 이미지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각 예술가가 정형화된 텍스트처럼 접근하면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번에 다녀온 바이칼 호수 여행도 원형적인 영감을 받았고, 이번 해에 작업을 마저 할 것 같다.

Q: 바이칼 작업도 영상 설치 작업인가?
박: 맞다, 잣치기를 전송한 시점부터 작업을 하고 있다. 째보가 전송했던 메시지에 시작점부터 작업을 하고 있다.

Q: 그 외에 따른 전시 작품은 없는가?
박: 당분간은 째보를 상영하고, 개인적으로 째보에 다음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그건 내년부터 공식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Q: 이번에 우리 영화제에 출품된 외국 작품도 하나의 작품을 두 가지 버전으로 보내왔는데. 째보도 여러 버전으로 제작된 것인가?박: 원래는 한 가지로 제작된 것인데, 멀티플 채널이고, 싱글 채널은 그걸 그대로 일렬로 세워놓은 것이다. 버전이 여러 가지인건 아니다. 총 네 개의 채널이 같이 간다. 형식이 여러 개는 아니고 째보 작업 같은 경우에는 동시적으로 읽히는 것이 옳다고 느꼈다. 여러 가지 사건을 어떻게 동시적으로 읽힐 수 있을까. 공간이 여유가 있고 합리적인 공간적인 루트나 여정이 된다면 나열된 형식으로 보는 게 맞다고 생각이 든다.

Q: 갤러리 안에서도 극장에서 상영하는 형태로 프레젠테이션을 많이 하는데, 관객의 시점이 작품에 일관적인 지속을 경험하기보다 파편적으로 느끼게 되는데, 문제는 공간 자체도 그리 구상이 되다보니 갤러리에선 작품을 읽기 어렵게 하지 않을까?
박: 작가의 지나친 욕심 일수도 있고, 작가 스스로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채널로 가도 되는 것을 여러 개로 쪼개놓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설치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이야기를 장시간 하나의 이야기를 뽑아내는 것은 스스로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영화를 전공했던 사람과 미술을 전공한 사람의 차이점이나 내 약점 같기도 하다. 

Q: 화면 구성을 변화를 주며 그 자체를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박: 시각예술을 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하나의 스크린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펼쳐놓은 이야기를 보다보니, 영상작업에 완성도를 추구하지만 전체의 이야기를 배제할 수는 없다. 

Q: 스토리보드도 다 만드는가?
박: 다 만든다. 욕심은 그것들을 다 묶어서 출판물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사진들도 아카이빙을 하고 있고, 드로잉이나 텍스트 글도 아카이빙을 하고 있다. 기회가 될 때 해보고자 한다. 그래서인지 액션에 대한 동경이 계속 남아있다. 영상을 만지면서 한동안은 마우스만 만지다보니 작품으로 잘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시나리오도 쓰고 의상 제작도 하면서 다시 작품을 하는 기분이 났다. 공정이 수고스럽지만 계속 고집하게 되더라.

Q: 그 전 작품도 그렇고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장식물이나 거울이미지가 가볍고 투명한 마스크라든지 몇 가지 키워드로 읽히는 것 중에서 반복되는 것이 있는데, 콘텍스트가 너무 없어서 순수하게 실험영화 같지 않는가?
박: 그렇다. 그래서 다른 공모에 지원하다보면 뒷심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있다. 컨텍스트가 상당히 개인적인 것인데, 난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개인의 이야기만큼 독창적으로 뿜어낼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들이 보편적인 컨텍스트들이 아닐까 한다. 이것이 개인적인 경험의 약점이 아닐까 한다.

Q: 그렇다 그런 점들을 제도에게 설명하긴 어렵다.
박:작은 소결론을 작품으로 만들고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이런 부분을 너무 무겁게 어렵게 하게 되면 작품이 무겁고 어렵다고 이야기되고, 다른 부분을 확대하게 되면 앞에서 진술한 약점이 생긴다. 

Q: 마지막으로 주변 제도 속에서 미디어 작가로써 특수한 점이 무엇이 있는가?
박: 처음에 한국 들어와선 투쟁을 부렸다. 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표현의 방법이 좀 서툴렀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지금도 가지고 있는 생각이지만, 그 투덜거림을 좀 귀기울여줬으면 좋겠다. 미술환경만 보자면 나는 기존의 이미 유명해진 미술관계자나 기획자 평론시스템에 대해선 크게 할 말이 없다.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베이스는 충분히 갖춰져 있고, 더 이상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이제 막 시작하는 기획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독자적인 우리의 이야기 또는 컨텍스트를 만드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훌륭한 전시를 공유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자신의 언어인 마냥 치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없다면 이 시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를 한 쪽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형태이다.  막 생산되는 건강한 요소를 읽고 만드는 작업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Q: 심플하게 말하면 제작, 관리, 유통 등의 각각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무엇인가?
박: 유통의 문제이다. 유통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시장의 이야기가 선결될 수 밖에 없다. 생산품에 대해서 어떻게 메길 것인가. 이 부분이 아직 실험영화라는 베이스에선 상업적으로 만들어지는 베이스와는 합일점이 이뤄지지 않기에 유통이 이뤄지지 않고 있지 않을까? 다 고생을 하고 있지만, 미술 시장에서 내 작품이 전혀 유통이 되지 않는다. 매체에 대한 가치가 합일이 안 되고 있다. 향유하는 향유자들이 생산품에 대한 가치를 그 정도로 매기진 않는다. 이 작가의 이름값이 올라가는 경우에 유통이 되기는 하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전혀 단계가 없다. 

Q: 국내에서 미디어 아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국내에서 비주얼 아트와 미디어 아트를 구별한다고 보는가?
박: 전혀 아니다.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에 공감한다. 그렇기에 계속 질문을 하지만 답을 찾지 못했는데, '누가(누구의)'라는 주어를 하나 추가해야 한다. 누가 인식이 부족한가에 대한 질문을 하다보면 구체적인 대안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예를 들자면 생산자의 인식일지, 한국에서는 미디어 아트나 비주얼 아트가 세밀화 되지 않고 작은 과목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루는 시장의 매개자들. 그걸 누리는 향유자등, 누가의 부분이 구체적으로 고민이 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인식 변화를 이뤄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미디어 아트와 비디오 아트에 대해 수업을 하다보면 이에 대한 인식이 잘 안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작품을 보는 훈련이 잘 안 되어 있다. 이 과정을 자꾸만 뛰어넘으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에게 한 작품을 끝까지 보게 하는 훈련을 많이 하게 하려고 한다.

Q: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묻는다면, 지금 한국에선 이 두 가지에 대해 어떻게 구별하고 있는가?
박: 글쎄, 아무래도 하나는 총체적인 요소로 지칭되고, 그 중의 작은 하나로 미디어 아트로 지칭되고 있는가.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미디어 아트는 신조어고, 새로운 장르이고 테크놀로지에 의존적이고 거기서부터 이야기들이 흘러나오는 것이 맞는데, 이 둘은 분리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디어 평론이나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에서 시각예술의 관점이 혼재된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디어 아트라는 맥락과 시각예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부분이 앞으로는 더 논의가 되어야 생각한다. 

 

1. 째보는 언청이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말이 우습지만, 째보선창의 내력을 더듬으면 마냥 웃을 일만은 아니다. 군산의 타율적 개항과 근대화, 일제의 수탈, 그로 인한 수난사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비린내를 안고 질척거리며 살아온 주민들의 삶은 '탁류' 그것이었다. 이는 곧 우리 근대사의 역정이다. '째보'란 이름의 배경이 궁금해 군산문화원에 문의했더니, 이복웅(62) 원장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원장은 향토사학자로 지명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몇 가지 얘기가 있지요. 먼저, 지리적인 측면에서 금강 하구의 째진 자리에 선창이 들어섰다 하여 그렇게 이름됐어요. 또 하나는, 일제시대 이곳에 째보(언청이)라는 힘센 사람이 있었는데, 외지인들에게 텃세를 부리며 자릿세를 뜯곤 했대요. 그 위세가 대단했겠지…. 어원적으로 이곳의 옛 지명인 '진보'가 '째보'로 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어요." 모두 그럴 듯하다. 스토리는 '힘센 째보'가 재미있다. 힘센 째보의 후일담은 전해지지 않지만, 일본인들이 뒷배를 봐주지 않았을까 싶다. 일제시대 수탈 구조의 연장선상에 째보선창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동빈(동부)어판장은 일본인들이 많이 이용했다. 일본인들은 값비싼 민어나 뱅어 등을 주로 먹었고, 한국인들은 비교적 흔하고 싼 갈치, 숭어, 아구 등을 먹었다고 한다. "째보선창은 그대로 군산항의 역사예요. 1899년 일본은 군산을 강제로 개항시켜 수탈 기지로 삼지요. 군산은 이때부터 전혀 새로운 역사가 쓰여져요. 1934년 통계를 보면 무려 200만 섬 이상의 쌀이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실려 나갔어요. 째보선창은 이때부터 성시였죠. 그 곳에 힘센 째보가 있었던 겁니다." 이복웅 원장의 말이다. (박창희,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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