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갤러리로의 이주에 대한 짧은 노트들

김지훈

영화의 갤러리로의 이주 (Cinema’s Migration into the Gallery)

오늘날 우리는 국내외의 각종 전시에서 영상작품들을 자주 보게 되는 근거로서 ‘영화와 미술 사이의 만남’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경향을 ‘영화의 갤러리로의 이주(migration)’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990년대 이후 영화의 존재론이라는 관점과 현대예술의 미학적, 매체적인 지형 변화라는 관점 모두에서 설명 가능하며 각각의 관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별도의 논문 또는 단행본 분량을 요구한다. 

그러니 간략하게만 요약해보자. 영화의 존재론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기존의 영화라는 대상과 관념을 지탱했던 구성요소들의 와해를 지적할 수 있다. 영화의 물질성을 지탱했던 셀룰로이드와 필름 카메라 기반의 무빙 이미지는 디지털 카메라와 프로젝션, 그리고 디지털 이미지 기법이 이미지의 합성과 조작 모두에 긴밀하게 관여하는 오늘날 더 이상 영화를 이루는 지배소들이 아니다. 실물보다 큰 스크린과 관객의 부동성, 상영시간의 집중을 특징으로 하는 극장이라는 인터페이스 또한 다양한 종류의 작은 스크린들과 파편화된 윈도우들, 관객의 자유로운 관람시간 조절, 스크린의 가동성(모바일 스크린)으로 대체되면서 전통적인 영화적 경험(cinematic experience)의 굳건함 또한 흔들린다. 영화적 이미지, 영화장치, 영화적 경험 모두가 자신들의 전통적인 경계와 구성성분을 잃고 인접예술들 및 미디어 인터페이스들, 시청각적 경험들로 수렴하고 발산하는 탈영토화의 국면들을 우리는 포스트-시네마적(post-cinematic) 조건들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은 영화의 죽음과 새로운 모습으로의 변환 또는 내세(afterlife)라는 이중나선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영화적’이라 일컬을 수 있는 다양한 필름 및 비디오 설치작품들은 바로 이 이중나선이 이루는 다양한 궤적들을 그린다. ‘영화의 리메이킹(remaking cinéma),’ ‘전시의 영화(cinéma d’exhibition), ‘다른 영화(autre cinéma)’ 등의 용어들로 지칭되어 온 이러한 작품들은 영화를 이루는 구성성분(화면구성, 촬영기법, 몽타주, 내러티브, 스타 이미지, 특정 시퀀스, 특정 장르)들을 취하고 그것들을 변형한다. 이러한 작용들은 전통적인 영화매체의 구성적 경계를 넘어서고 영화와 비디오아트, 조형예술을 공존시키는 무빙 이미지 작품들, 또는 영화의 사회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기능과 영화의 운명을 성찰하는 메타-영화적인 작품들로 귀결된다. 이러한 ‘전시의 영화,’ 다른 영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실천가들은 예술제도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넘어 아이작 줄리안(Isaac Julian),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 아톰 에고이안(Atom Egoyan), 샹탈 아케르만(Chantal Akerman),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 등 작가영화와 실험영화, 대안적 다큐멘터리와 에세이 영화의 세계를 깊이 있게 구축한 시네 아티스트들 또한 포함된다. 

현대예술의 미학적, 매체적인 지형 변화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날 예술가의 영화/비디오(artists’ film and video)라는 용어 아래 자주 묶이는 주요 실천가들(더글러스 고든(Douglas Gordon), 스탠 더글러스(Stan Douglas), 에이자-리자 아틸라(Eija-Liisa Ahtila),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필립 파네로(Phillippe Panerro) 등 수많은 예술가들 중 단 몇 명)이 표준적인 영화(대중문화로서의 영화와 예술로서의 영화 모두의 의미에서)의 전성기 하에 예술가적 수업을 받은 시네필들 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점에 근거하자면 이러한 실천가들에게 영화의 요소들은 문화적 기억의 원천이자 전유와 재활용의 대상이며, 영화작가는 여타 예술에서 불가능한 기술적, 물리적, 표현적 수단들의 통제를 가능케 했던 이상적인 예술가상을 제공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비디오의 기술적, 미학적 위상 변화 또한 영화의 갤러리 이주에 기여한 중요한 요인으로 설명된다. 아날로그 비디오와 비교할 때 고화질을 담보하는 비디오카메라와 프로젝터는 전통적인 영화형식과 관람성을 구성하는 어두운 방(black box)의 관람환경, 실물보다 큰 스펙터클한 이미지,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가 재현하는 심리적 깊이, 감각적인 풍부함과 몰입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무빙 이미지를 갤러리로 이주시켜 설치하는 기술적, 미학적 시도들은 1990년대 이후의 여러 전시들을 횡단하는 예술가와 감독들의 작품들보다 훨씬 앞서 벌어졌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폐쇄회로 비디오 및 비디오 퍼포먼스를 포괄하는 초기 비디오아트의 흐름들은 전시공간에서의 필름 프로젝션 작품들 및 퍼포먼스들과 나란히 이어졌다. 마이클 스노우 (Michael Snow), 폴 샤리츠(Paul Sharits), 홀리스 프램튼(Hollis Frampton), 안소니 맥콜(Anthony McCall) 등이 주도했던 구조영화(structural film)의 실험적 시도들은 초기 비디오설치 및 퍼포먼스는 물론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데니스 오펜하임(Dennis Oppenheim), 댄 그레이엄(Dan Graham)의 필름 작품들과 공존했다. 이러한 복잡한 계열들을 이루는 실천가들 몇몇은 분명 필름과 비디오의 물질적, 기법적 본질을 규정하는 매체 특정성(medium specificity)에 대한 탐구를 작업의 주요 동기로 삼았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 나아가 관습적인 극영화의 이미지와 관람성이 유지했던 경계들을 와해시키고 과정(process)과 수행(performance)으로 예술 자체를 재정의 하려는 관심사를 공유했다. 그래서 이들의 종적이고 횡단적인 실천들 주변에는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포스트-미니멀리즘, 장소-특정성 미술 등 모더니즘 이후의 주요 화두들이 따라다녔다. 비규범적인 형태들과 예술가적인 생산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아방가르드 영화가 미술관에서 상영프로그램이나 전시의 실천으로 이 시기에 제도화되었고 비평적인 지지를 받았던 이유 또한 이 때문이다.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휘트니미술관 등은 일련의 그룹전과 비엔날레를 통해 이러한 전시의 기조를 80년대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이어갔다. 최근의 미술사학 연구들은 회화와 조각의 구성을 재고하기 위해 무빙 이미지의 시간성과 운동성을 도입하고자 했던 1950년대 포스트-다다이즘의 대안적 전시 모델들에서 무빙 이미지와 갤러리의 결연에 대한 계보를 발견하기도 한다. 

즉 영화의 갤러리로의 이주에 대한 역사들은 지금 우리가 동시대적으로 목격하는 작가군들과 그들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미학적, 주제적 관심사들을 넘어선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갤러리와 극장을 동시에 횡단하던 필름과 비디오 싱글채널 및 설치작품들은 관습적인 무빙 이미지의 환영주의에 반하여 무빙 이미지의 물리적 본성들을 탐구하고, 스크린과 모니터, 프로젝터의 다양한 설치 포맷들을 통해 표준적인 시각문화의 고정된 단일 시점을 와해시키고 이미지와 주변 공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람자의 신체적, 인지적 지각을 활성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관심사들 중 어떤 것들은 오늘날의 ‘영화적인’ 필름 및 비디오 설치작품들에 계승되거나 변형되었으며, 이러한 작품들은 이 당시의 관심사들과는 다른 종류의 관심사들(예를 들어 아방가르드 영화가 아닌 예술영화와 주류 극영화의 이미지와 스펙터클)을 표명한다. ‘포스트-시네마’적인 것들이라 말할 수 있는 이 모든 역사들은 서구의 영화학계와 예술사학계에서도 200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지만, 아직 이 땅에는 전시와 연구 모두에 있어서 비교적 미지의 영역(uncharted territory)으로 남아 있다.  

실험영화의 갤러리 진입, 그리고 모순들
(Contradictions in Experimental films’ Entrance into the Gallery)

예술가의 필름 및 비디오 설치작품들의 범람, 그리고 2차 대전 후 확장영화 및 실험영화의 흐름 속에서 영화와 예술 사이의 다면적 관계들에 대한 재평가는 무빙 이미지의 갤러리 이주에 해당하는 또 다른 최근의 경향을 가능케 했다. 영화사 및 영화이론 연구에서도 주변부에 존재했던 아방가르드 영화의 주요 감독들 및 작품들이 2000년대 이후 해외 각종 전시들에서 소개되기 시작했다. 2001년 휘트니미술관의 “Into the Light: The Projected Image in American Art 1964-1977”는 1960년대와 70년대의 필름 및 비디오 설치작품들이 공유했던 반-환영주의적 충동들과 매체의 물질성과 과정성에 대한 탐구, 능동적 관람성에 대한 욕망을 재조명하는 기념비적 전시였으며 이후 “X-Screen: Film Installation and Actions in the 1960s and 70s”(Museum Moderner Kunst Stiftung Ludwib Wien, 2003-2004), “Le Mouvement des Images” (2006, 퐁피두센터) 등의 커다란 그룹전들이 이 시기의 작품들을 포용하거나 아방가르드 영화의 중요한 정전들을 나름의 테마들 아래 포용하기 시작했다. 최근 일민미술관의 전시프로그램인 “애니미즘전” 또한 바로 이러한 흐름에 속하는 전시였다. 필름과비디오를 망라하는 미디어들이 조직하는 다양한 애니미즘의 양태들을 계보학적으로 재구성한 이 전시에는 렌 라이(Len Lye), 켄 제이콥스(Ken Jacobs), 예반트 지아니키안과 안젤라 리치-루치(Yervant Gianikian & Angela Ricci-Lucchi) 등 수작업 필름 애니메이션과 습득영상(found footage) 작업으로 잘 알려진 실험영화 감독의 작품들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은 영화관과 갤러리 사이의 만남이 낳는 여러 가지 모순들을 내장한다. 제일 먼저 다가오는 모순은 포맷의 문제다. 필름이 갤러리에 설치될 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오리지널 포맷인 프로젝터를 수반하거나 필름의 관람환경인 블랙박스의 포맷을 유지하는 경우다. 그러나 각 미술관들의 재정적, 기술적, 공간적 한계들 이외에도 16mm필름의 루핑(looping) 프로젝션을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인력이 부재한 국내 전시의 환경에서 이러한 바람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지금까지 많지 않았다. ‘애니미즘’전만 보더라도 렌 라이의 작품이 보여주는 셀룰로이드의 역동적인 변화는 필름 프로젝션이 아니라 비디오 포맷으로 구현되었으며, 플리커(flicker)효과가 일으키는 입체경적 환영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는 제이콥스의 작품은 블랙 박스가 아닌 화이트 큐브의 밝음에 둘러싸여버렸다. 

포맷의 문제 이외에도 관람 인터페이스의 문제 또한 제기될 수 있다. 영화관과 갤러리는 서로 다른 시간 경제(temporal economy)에 따라 작동한다. 영화관에서의 영화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시간 경제는 상영시간(screen time)이다. 우리는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이미지가 전개하는 지속시간에 집중적으로 참여하며, 상영시간은 이러한 집중을 가능케 하는 선결조건이다. 그러나 갤러리에서는 개별 관람자가 특정 작품 또는 작품들 전체에 얼마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가에 대한 선험적인 척도가 없다. 전시의 매커니즘은 영화에서의 상영시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관람자에게 시간성을 부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로 인해 갤러리의 방문은 폴 오스본(Paul Osbourne)에 따르면 관람자의 자유로운 선택과 이동을 특징으로 하는 정신분산(distraction)의 관람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한편으로 집중에 대한 불안을 해소할 수도 있지만 영화가 요구하는 집중의 관람성과 충돌한다. 이러한 집중의 관람성은 60년대 이후의 아방가르드 영화가 작품의 형식들은 물론 나름대로의 상영 및 관람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추구해 왔던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폴커 판텐부르크(Volker Pantenburg)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적절하다. “설치작품들과 블랙 박스들을 동바구비한 미술관이 모든 종류의 무빙 이미지들을 초대할 수 있다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있다. 내게 있어서 이 이데올로기는 한계를 갖고 있으며 실험영화의 역사는 우리에게 바로 이 점을 가르친다.” 

병행: 하나의 영화, 다수의 영화들 (Parallel: One Cinema, Multiple Cinemas)

판텐부르크의 주장, 그리고 실험영화가 갤러리로 진입할 때 제기하는 모순들을 고려하면서 나는 “‘하나의 영화’와 ‘다수의 영화들’의 병행”을 갤러리가 영화를 포용하는 과정에서 취해야 할 이상적인 존재론적 모델로서 주장한다. 레이몽 벨루르(Raymond Bellour)는 90년대 이후 갤러리에서의 필름 및 비디오 설치작품에 대해 자신이 붙였던 ‘다른 영화’라는 용어를 넘어 이들을 ‘다수의 영화들’로 지칭한다. 벨루르에 따르면 이러한 작품들은 전통적인 영화가 펼쳐낸 역사와 동일시할 수 없다. 전통적인 영화의 형식들을 차용하고 변형하면서도 그것들에서 얻을 수 없는 다른 종류의 형식들과 경험들을 동시에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들에 직면하여 벨루르는 (평론가 세르주 다네(Serge Daney)의 용어를 차용하여) 전통적인 영화가 역사적으로 구현해 온 다양성과 독특성의 광대한 역사를 가리키는 ‘오직 영화만이(cinema alone)’라는 용어를 나란히 놓는다. 이 용어는 영화가 탄생 초기부터 인접 예술들과 소통하고 미디어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극장과 단일 스크린이라는 인터페이스들을 통해 여러 가지 모습들로 변이하면서 자신의 특정성을 유지해 온 예술임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로서의 영화를 ‘하나의 영화(One cinema)’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이 ‘하나’는 내부의 ‘다양체(multipilcity)’들을 펼치고 접어 왔다. 장르영화, 예술영화, 실험영화라는 커다란 범주들로 환원되지 않는). 이 ‘하나의 영화’는 분명 오늘날 우리가 다양한 모습들로 목격하고 있는 ‘다수의 영화들’을 위한 자양분이 되지만, 그 나름의 역사와 경험은 공존하면서 보존되고 탐구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영화’와 ‘다수의 영화들’의 병행“이라는 모델은 2007년 도큐멘타 11(Documenta 11)에서 실현된 바 있다. 메인 전시 프로그램들은 다양한 형태의 필름 및 비디오 설치작품들을 포함한 반면, 필름 프로그램을 맡은 알렉산더 호워드(Alexander Horwarth)는 예술영화와 실험영화의 광대한 역사를 포괄하는 상영 프로그램을 극장에서 독립적으로 구현했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기획에 대해 호워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도큐멘타 12에서 영화의 장소는 영화관이다. 이는 무빙 이미지가 예술의 맥락에서 적합하게 제시되는 방식과 관련된 최근의 논쟁들에 대한 단순한 대답이다. 영화매체는 예술로서 기능할 수 있는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는 동시에 강력한 상영 포맷과 사회적 공간을 가져 왔다. 이러한 포맷과 공간은 영화매체의 물리적, 기법적 성격들에 근거한다. 이 성격들로 인해 영화는 특정한 수준의 강렬함 속에서 지각될 수 있고, 이러한 강렬함이 영화의 역사적 성공을 안긴다.” 

EX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