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의 일기체 영화에 대한 소론

김영진

이 글은 요나스 메카스 Jonas Mekas에 관한 온전한 작가론이 아니다. 나는 메카스의 영화 가운데 <천국은 아직 여기에 또는 우나의 세 번째 해 Paradise Not Yet Lost, or Oona's Third Year> (1980),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 Lost, Lost, Lost> (1976), <월든: 다이어리, 노트, 스케치 Walden: Diaries, Notes and Sketches> (1969), 그리고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As I Was Moving Ahead Occasionally I Saw Brief Glimpses of Beauty> (1980)의 일부를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것 뿐이라도 앞으로 쓰게 될 글의 분량 만큼만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각의 영화들의 상영시간이 꽤 길기도 했지만 일종의 아방가르드 홈무비이자 일기체 영화로서 요나스 메카스의 삶에 대해 적지 않은 것을 접수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뭔가 알게 되었다거나 공감했다거나 하는 것보다는 화면에 흐르는 요나스 메카스의 감정 그 자체를 공유하면서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 동안 그와 함께 어느 방에서 과거사를 듣는, 과거사를 얘기하는 그 자신과 독대한 듯한 받았다고 하는 것이 그의 영화로 누린 경험에 좀 더 가까울 것이다. 

<As I Was Moving Ahead Occasionally I Saw Brief Glimpses of Beauty>(1980)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

내가 본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는 모두 그의 가족, 주변 커뮤니티의 일상을 기록한 것이다. 이 일상에는 사건도 포함되지만 사건이라고 부를 수 없는 단속적인 인상을 기록한 것도 많다. 두서없이 펼쳐진다는 인상을 처음에는 주지만 지속적으로 보면 일종의 구조적 원칙이라고 할 것이 발견된다. 메카스 자신이 ‘힐끗 보는 것glimpse'이라고 표현한 대로 사물과 대상과 인물을 보는 숏들이 종종 전광석화처럼 스치듯이 지나가며 펼쳐진다. 메카스의 일기체 영화의 출발점이라고 얘기되는 <월든>에는 전설적인 명감독 칼 데오도르 드레이어가 뉴욕을 방문했을 때 찍은 숏들이 나오는데, 노출을 다르게 해서 색깔도 다르고 다양한 앵글의 인물 숏이 펼쳐진다. 오늘날 TV 방송에서 음악을 깔고 인물을 소개하는 겉멋들린 영상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장면은 TV의 소비적인 숏들과는 다른 감흥을 전해준다. 화가가 붓으로 어떤 인물을 그려냈을 때의 단속적이지만 축적된 인상의 단위들이 이 짧은 숏들의 나열에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메카스의 다큐멘터리의 ‘기록’에는 왜 사진 초기의 대가인 나다르Nadar의 사진에 필적할 만한 축적된 아우라가 가능한 것일까. 물론 이것은 개별 숏들의 구성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메카스의 카메라에 포착된 데오도르의 인상은 몽타주된 이미지들의 배열에서, 흐르는 삶의 감각에서 축적된 것이다. 아, 이 사람이 칼 데오도르 드레이어구나, 하는 이미지의 인상이 소재가 된 사람의 분위기와 즉각적이면서 기적적으로 결합된 듯한 그런 속성이 메카스의 영화들에는 스며있다. 이것은 과장일까. 메카스가 그려낸 이미지의 기록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혁신적인 것일까. 오늘날 메카스가 하는 작업을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주변 일상을 기록하면서 하고 있다. 아이들의 돌잔치나 유치원 재롱잔치나 부모의 회갑연 따위를 찍은 영상을 후에 편집한다고 할 때 편집실에서 이와 유사한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비결은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메카스의 영화는 어떤 특정한 연대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눈에 식별할 수 있는 극적인 내러티브가 존재하지 않는다. 클라이맥스도 없다. 어떤 것을 계획해 연출했다고 하는 흔적도 없다. 메카스의 일기체적 다큐멘터리는 그의 삶 주변에 일어난 사건들을 찍은 결과물이다. 대개는 일상적 삶의 디테일에 주목하는 것이다. 결혼식이 열린 교회 앞에 메카스가 들고 있는 카메라 앞을 사람들이 서성거리거나 카메라 앞에서 아는 체를 하는 사람의 얼굴 따위를 그의 영화는 기록하고 있다. 그의 친구들을, 재미난 일들을, 계절의 변화를 나타내는 도시의 풍경들을, 그와 그의 가족들이나 그의 친구들이 먹는 음식들을 그는 찍었다. 숏들은 깜빡거리며 빠르게 지나가고 지극히 짧은 프레임으로 스쳐지나가는 것도 있으며 다양한 노출로 분해되고 때로는 이중인화되기도 한다. 메카스의 이미지는 정교하게 스크린에서 깜빡거린다는 인상을 준다. 조각으로 분절된 상태에서 어떤 숏은 길게 지속되고 어떤 숏은 짧게 지나간다. 이게 극적인 내러티브의 리듬을 통제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음악이 깔리거나 메카스 자신의 내레이션이 흐르는 가운데 지나간 일을 기록한 사진 앨범을 볼 때처럼 각각의 이미지는 숱한 소제목들로 나뉘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센추럴 파크에서의 나른한 일요일 오후를 소재로 하거나 집안 가장이 귀가해서 먹는 소박한 저녁식사이거나 어린 시절에 대한 짧은 회상과 같은 것이다. 

메카스는 자신을 ‘영화작가Filmmaker’라고 여기지 않았으며 ‘필름에 담는 사람 filmer'라고 여겼다고 한다. 사건들을 계획하고 찍는 사람이 아니라 순간의 정수를 포착하는 사람이다. 그는 필름을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찍는’ 사람이었다. 찍는 것을 편집할 때 그는 객관적 리얼리티를 그의 내면의 상상적 세계와 연결시키는데 그의 내면의 리듬에 따라 이미지를 이어붙인다. 그게 과거의 필름이라 하더라도 현재의 심상에서 바라본 그 과거의 필름은 더 이상 과거의 필름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2000)에서 그는 단란했던 그의 가정사의 과거를 담은 필름을 바라보면서 현재는 헤어진 아내의 행복한 모습을 편집실에서 바라보며 그의 영화를 완성했다. 행복했던 과거는 사라졌고 현재에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우연히 나는...>는 과거에 대한 향수뿐만 아니라 쓰디쓴 상실감을 담아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결말부에서 요나스 메카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겠다. 나는 약간의 아름다움을 봤다. 아름다움과 행복을 흘낏 봤다. 그렇다. 미를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현실적인 것이다. 내 영화만큼이나 현실적인 것이다.”

메카스의 영화에 흐르는 것은 결국 덧없이 흐르는 생의 감각, 그렇지만 덧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함으로써 더 치열해질 수 밖에 없는 생의 감각이다. 외부의 객관적인 리얼리티, 기억이라는 주관적 통로를 통해 환기된 과거의 이미지는 현재에 환기됨으로써 재생되지만 그것 역시 흘러가고 있다. 모든 것은 보는 순간 완전하게 다시 사라져가는 것이다.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바로 그 환기와 상실과 사라짐의 감각을 체험하는 것이다. 메카스의 내부세계의 반영으로서의 외부세계, 과거의 이미지를 본 것이지만 주관과 객관, 내부와 외부가 일치되는 경험이기도 하면서 현재와 과거가 섞이는 체험이기도 한 것이다. 

메카스에게 영화는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그가 살았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뭔가를 찍었다. 나중에 그는 그렇게 찍은 필름들을 편집테이블에서 보면서 재구성한다. 그의 영화 속의 이미지들은 사건들의 카탈로그 그 이상이다. 연대기 순을 따르지도 않으며 일련의 설명할 수 없는 질서로 분별없이 나열된다. 연대기적, 스토리텔링의 순서대로 포박되지 않음으로써 이미지화된 그의 기억들은 현재의 생생한 기록으로 재구성된다. <월든> (1969)에서 처음 시도된 그의 일기체 영화형식은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2000), <천국은 아직 여기에 또는 우나의 세 번째 해 >(1980),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 (1976)에서 되풀이되는데 모두 일정한 기간 동안 메카스의 삶의 기록을 집적한 것들이다. 


<월든>은 앞서 말한 대로 메카스의 첫 번째 일기체 영화다. 1964년에서 1969년까지 찍은 이미지들을 모은 것이다. 뉴욕에서 친구들과 함께 보낸 생활, 시네마테크 활동과 영화작가들과의 교류, 뉴욕언더그라운드 활동이 담겨 있고 계절변화를 나타내는 이미지들과 결혼 등의 사적인 잔치 등이 수록돼 있다. 메카스의 친구들과의 우정에 대한 찬양과 인디펜던트 시네마 공동체의 활기에 대한 자긍심이 스며있다. 잘 아는대로 메카스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산파같은 존재였다. 리투아니아 이민 출신인 그는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겪은 후 미국에 와서 프레드 진네만이 연출한 이민자들에 관한 영화를 보고 분노해 그 자신이 직접 진실한 영화를 만들어보겠다고 결심하면서 영화에 입문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주류 상업영화에서 진실한 영화를 볼 가능성을 포기하고 새로운 유형의 영화를 만들고 후원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영화저널에 새로운 영화의 역할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열정적인 글을 활발하게 썼고 뉴 아메리칸 필름 그룹을 조직해 대안 영화의 배급과 상영을 후원했다. 그의 삶에서 카메라는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구분하지 않도록 해주었다. 필름 저널내 카메라는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삶에 참여하도록 해주었다. <월든>은 그에 관한 그 자신의 고백록 같은 성격의 다큐멘터리이다. 필름이라는 매체를 완전히 개인화해서 카메라로 찍는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찍을 때 직관적으로 구사한 셔터 스피드와 초점이동과 노출변화 등으로 그는 화면을 기계적으로 찍는 게 아니라 구성한다. 손으로 그리는 그림처럼, 또는 특유의 문체를 과시하는 글쓰기처럼 그의 영화 스타일도 식별가능한 개성을 갖고 있다. 기술적으로 불완전해보이는 상태로 그는 대상에 다가선다. 물리적으로 완벽한 복원을 꾀하는 것과는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그는 상황에 대한 직관적 반응의 기록으로서, 그리고 편집실에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 만들어낸 상상의, 꿈의 물결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냄으로써 외적인 리얼리티를 내적인 마음의 반영상태와 완벽하게 결합해낸다. 기술적 완성도로 추구될 수 없는 경지에서 그는 기록이라는 행위를 내면의 투사와 겹치게 만드는 것이다. 


Lost Lost Lost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는 2차 대전 후에 미국에서 살게 된 메카스의 주변 삶의 필름 푸티지들이다. 대략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윌리암스버그에 사는 리투아니아 공동체와 맨해튼으로 이사한 메카스가 거기 적응해 인디펜던트 영화판과 예술계에서 통합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지극히 사적으로 접근한 이 다큐멘터리에서 메카스는 내레이션을 통해 이토록 외로운 적은 없었다는 개인적인 감정을 거리낌없이 토로한다. 뉴욕 맨해튼으로 와서 그가 매일 밤 홀로 걷고 길고 긴 밤을 보내는 과정이 이 영화에 기술돼 있다. 그는 가끔 코네티컷에 가서 이민자 친구들과 모여 과거의 기억을 교환한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 속에 살지만, 그리고 메카스 자신도 리투아니아 이민들의 삶에 공감하지만 궁극에는 그 자신을 그 공동체의 테두리에서 떼어낸다. 그는 뉴욕에서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리투아니아 공동체를 묘사하는 단락에서 그 사람들은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그리며 살아간다. 메카스는 이들의 삶을 찍으면서 고향의 삶의 흔적을 환기시키는 목가적인 풍경들, 이를테면 꽃이나 나무와 같은 자연 풍경을 담은 이미지들을 자주 채워 넣는다. 어린 시절의 리투아니아를 찍는 기분으로, 이런 숏들은 무작위로 즉흥적으로 그의 기억에 따라 연결되고 재구성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도 <Lost, Lost, Lost>의 첫 번째 부분은 묘한 상싱감이 도드라진다. 그들은 아마 고향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일종의 시체애호증 같은 기분으로 도달하지 못할 희망으로 과거에 갇혀 사는 일들의 현재의 찰나적인 즐거움을 추적하는 이 단락은 기억의 양가성, 존재하지 않거나 도달하지 못할 것을 그리는 이들의 정서를 빙 둘러 화면에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행위는 과거 속에 갇혀 사는 것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에서 보이스 오버로 메카스는 말한다. “과거와 현재는 섞이고 이중인화된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섞인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기억이 되는 것이다. <천국은 아직 여기에 또는 우나의 세 번째 해> (1980)에서 메카스는 고향을 방문한 아내가 들판을 걸을 때 아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것으로 묘사한다. 아내가 길을 걷는 현재도 곧 과거가 된다. 시간은 흐른다. 모든 것은 과거가 되고 기억 속에 있는 것이다. 기억 속에서 삶은 흔적을 드러낸다. 불완전한 형태로. 그의 영화가 스토리가 되지 않는 것은 타당하다. 우리의 기억은 조각난 채로, 분절난 채로, 섬광 같은 인상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의 단위로 떠오른다. 그의 영화는 그 기억의 독특한 영화적 재현물이다. 그 과정에서 기억은 스토리텔링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의 뇌리에 말을 걸어온다. 축적된 인상의 단위는 현재의 삶의 감각으로 완전하게 포섭된다. 대체로 긴 이 글에서 언급한 영화의 상영시간들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의식의 한 흐름을 따라갔다고 돌아오는 것처럼 메카스의 영화는 축적된 기억의 인상들을 끊임없이 연상하며 꾸게 된 꿈의 여행과 비슷하다. 깨어나면 오래도록 기시감이 남을 듯한 착각이 생기는 것이다.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2000)는 1970년에서 1999년까지 오나스 메카스가 아내 홀리스 멜튼과 딸 오나, 아들 세바스찬과 함께 살았던 행복한 결혼생활이 소재인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과거의 모든 것은 동시에 뒤엉키는 느낌이다. 역시 이미지는 스토리보다는 인상으로 다가온다. 메카스는 내레이션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 저기 있는 것이 나다. 그리고 그건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지금 이 이미지들을 보고 있는 현재의 내가 진정한 나다.” 그는 그는 계속해서 화면 속의 이미지에 대해 코멘트하며 기억하는 것의 즐거움을 나눈다. 이미지는 휙휙 사라지는데, 그는 그것들에 대해 논평한다. 이것은 그의 과거의 일기이자 동시에 영화만들기에 대한 일기이기도 하다. 이 점은 중요하다.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주제를 다루는 영화일기에 대한 영화인 것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과거의 이미지, 기억을 환기시키는 이미지를 재생하는 영화라는 매체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은 모든 게 끝났다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현재의 사라지는, 모든 게 가버렸다는 그 느낌 속에서 추적된다. 현재의 덧없는 생의 감각이 흐르는 것이다.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는 과거의 회복이자 과거의 재구성이며 그걸 담당하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논평이다. 이미 모든 것이 가버렸다는 느낌은 동시에 이 자리에서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현재적 감각과 상보적인 대구를 이룬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모으려는 메카스의 욕망은 상실감에 대한 감각을 불러 모은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주의 깊은 되새김, 그것이 아름다움을 흘낏 보는 감각의 또 다른 재능이 아닐까. 메카스의 영화적 기억은 행복과 불행을 나누지 과거와 현재를 나누지 않는다.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암시하는 순간에는 고통과 상실감과 단단히 결박돼 있다. 생의 기쁨에 대한 감각은 그림자처럼 고통에 대한 감각을 동반하고 있다. 행복이 불행을 덮는 것도 아니고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 메카스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무구하다. 사람들이 무구하지 않을 뿐이다.” 희노애락이 불가피한 인생에서 살아있는다는 것의 감각을 무구하게 만끽하는 영화의 가능성에 대한 예찬으로서 이만큼 멋진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HANGJU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