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이지와 즉흥성

홍철기

* 이 글은 EXiS2008의 존 케이지 특별전의 별도 소책자를 위해 썼던 글이다. 당시 원문의 매끄럽지 못한 문장은 집필 의도를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수정하였다.

1. 침묵, 우연성, 비의도성

20세기 음악에 대한 존 케이지의 공헌은 '침묵'과 '우연성'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두 단어는 케이지 자신의 음악론(혹은 비-음악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열쇠가 된다. 하지만 그의 음악론에서 정작 침묵과 우연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은 많이 논의되지 않는 것 같다. <4분33초>로 알려진 음악에 침묵의 도입, 그리고 그에 따른 전적인 우연성의 도입과 같은 케이지의 시도가 어떤 질문과 관련되는가 하는 것은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겉보기에도 물론 문제는 간단치 않은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침묵을 작품의 가장 중심에 두었지만, 결코 침묵은 '순수한 무음(無音)상태'를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침묵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죽을 때까지 소리는 존재할 것이고, 그 소리는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침묵의 음악'이나 '우연성의 음악'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음악의 미래'에 대한 그의 언급을 기억해야만 한다―<4분33초>의 반복된 재현(혹은 재연)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침묵의 음악'과 같은 무의미한 말을 되풀이하는 쉬운 길은 피하고자 한다. 침묵과 우연성을 음악에 도입한다는 시도 그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검토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침묵과 우연성이 음악이라는 범주로 간주되는 이상 음악은 더 이상 그 이전과 동일한 구조나 형식을 갖는다고 할 수 없다. 침묵과 우연성은 각각 음악성의 중요한 두 가지 축인 소리와 구조(혹은 규칙이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작곡자에 의한 연주의 '예측가능성')에 대한 한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두 한계가 음악 자체의 소재가 되면서 경계와 영토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더 이상 침묵과 음악, 우연성과 규칙은 단순히 '유형론(typology)'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침묵과 우연성은 사실 존재론적으로 이러한 범주들 외부에 놓여있는 것이기도 하다― '위상(topology)'의 변형을 겪을 수밖에 없다.

케이지 자신이 침묵과 우연성을 하나의 단일한 프로젝트와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비의도성(non-intention)", 혹은 "무의도성(purposelessness)"의 기획이다. 이는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의도적인 비의도성(intentional non-intention)", 혹은 "의도적 무의도성(purposeful purposelessness)"의 기획이다. 그에게 침묵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곧 비의도성을 실현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연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의도를 비-의도로 전환시키기 위한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다―다른 한 가지 방법은 바로 뮤직서커스(musicircus)다.


2. 침묵과 침묵시키기: 잠재성의 역설

더글라스 칸(Douglas Kahn)에 따르면 케이지는 <4분 33초>를 통해 침묵을 음악의 한 요소로 간주하여(혹은 음악의 소리를 침묵으로 변형하여) "모든 음향(all sound)"[순수 침묵의 불가능성의 공간적 개념]을 들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모든 음향'을 듣게 된 덕분에는 청자는 "영속적 음향(always sound)"이라는 시간성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영속적 음향이란 순수한 침묵의 불가능성을 시간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결국 침묵의 음악적 실현은 공간적으로 상존하는 음향과 시간적으로 지속하는 음향 모두를 듣기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소리를 이전에는 들을 수 없었는가 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케이지에 의해 '듣기의 영역'으로 들어온 음향은 원래 언제나 모든 곳에 존재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이 영역의 경계에 놓이거나 그 외부에 놓였던 소리다. 그래서 다른 큰 소리 혹은 잘 들리는 소리('음악')를 침묵시키지(silencing) 않으면 이를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다른 소리, 혹은 (거의) 모든 소리를 침묵시켜야 한다.

"케이지의 침묵은 (...) 처음부터 '침묵시키기'에 기댄 것이었다." 칸은 케이지가 이와 같은 역설, 즉 모든 소리를 듣기 위해, 혹은 모든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모든 소리를 침묵시켜야만 한다는 역설을 적절하게 해소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케이지는 이 문제를 이와 같은 역설의 형태로 제시할 수 있었다고 볼 수는 있다. 케이지는 침묵시키기 다시 말해 모든 종류의 소리만들기를 중단함으로써 들을 수 없는 소리와 들을 수 있는 소리의 관계를 처음으로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잠재성(potentiality)이라는 서양 형이상학의 난제와 연관시켜서 생각해보면 단지 역설의 해소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들을 수 있음'과 '들을 수 없음'의 (비)대칭적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현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를 경유할 필요가 있다. 그는 가장 창조적인 행위란 '할 수 없음'과 '할 수 있음'의 이분법 자체를 문제 삼고 거부하여, 그런 이분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있다고 봤다. 아감벤에 따르면 서양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잠재성(dynamis)의 개념―잠재성과 행위(energeia), 혹은 잠재성과 현실성(actuality)의 개념 쌍―을 고안함으로써 이러한 이분법의 패러다임을 등장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행위를 통해서만 잠재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메가라학파에 반대하면서 언제나 잠재성의 자율적인 존재를 긍정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키타라(kithara)연주자가 "그의 능력[연주할 수 있는 잠재성]을 그가 연주하지 않을 때조차 유지"하고 "건축가는 자신의 축조 능력을 실제로 행하지 않을 때조차" 그 잠재성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잠재성이란 실제의 행위 없이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만일 메가라학파의 주장을 따른다면 악기 연주자의 연주 능력은 악기를 연주하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연주하지 않을 때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연주자의 다수의 연주 행위 간에는 일관성과 연속성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잠재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으로 정의되고 따라서 존재의 일관성을 부여받는 잠재성(서구에서는 어원상 '능력(potentia)'과 동의어)이란 역설적이게도 '할 수 없음'과 동의어가 된다. 왜냐하면 언제나 존재하는 잠재성, 즉 능력을 현실화하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시점 이전과 이후에도 존재해야 하고, 그렇다면 행위가 완료되어도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고 언제나 남아 있는 '나머지'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잠재성이란 결국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능력이며 그런 점에서 비-능력이다. 그것은 언제나 현실화가 "중지(suspension)"되는, 언제나 잠재성으로만 남아 있을 수 있는 능력의 부분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잠재성은 또한 곧 비-잠재성(im-potentiality)이기도 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잠재성에 관한 앞서 짧게 소개한 형이상학적 논의가 '존 케이지의 침묵'을 이해하는데 어떤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까? 잠재성이란 현실성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현실화될 수 없는 잉여 혹은 과잉으로 존재한다. 이를 사실 침묵과 '음악의 소리'간의 관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소리를 만드는 행위는 단순히 다른 잠재적인 소리를 침묵시킬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그러한 소리가 침묵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전제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음악은 언제나 다른 비음악적 소리가 침묵하기를 원한다. 현실적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이유에서도, 음악공연을 보는 관객은 침묵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이분법을 어떻게 극복하고 무력화시킬 것인가? 잠시 아감벤의 사유로 되돌아가 보자. 그는 글렌 굴드(Glenn Gould)를 예로 들면서 이러한 이분법 자체를 거부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굴드는 연주자로서 "순수한 잠재성"을 유지하면서 잠재성과 현실성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극복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할 수 없음(비잠재성)'과 '할 수 있음'의 경계에서 '연주할 수 없음'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할 수 있음'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없음'을 하는 것―단순히 하지 못함―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연주할 수 없음'의 능력 안에서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창조적이고 가장 최고의 능력이라는 의미다. 이제 케이지의 침묵으로 돌아오자. 아감벤이 이해한바 굴드가 연주자로서 연주하지 않음을 통해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을 보존하였다면, 작곡가로서 케이지는 자신이 만들 수도 있었을 소리를 침묵시킴으로써 소리의 순수한 잠재성을 보존하고 이를 드러낼 수 있었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행위―혹은 사실은 '비-행위(Nicht-Handeln)'의 행위―가 진정으로 창조적인 최고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 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잠시 판단을 유보하자. 잠재성과 현실성의 역설적인 관계라는 형이상학적인 렌즈를 통해서 봤을 때 케이지가 직면했고 또한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했던 문제란 생각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봐야할 것이다.


3. 불확정성

사실 존 케이지의 작업이 침묵에서 멈추었다거나,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거의 침묵에 가까운 무음 상태로 수렴되는 결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케이지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편재한 음향의 순수한 잠재성을 탐구한 작곡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의도적 비의도성이라는 표현 또한 여전히 케이지의 기획을 아감벤이 정식화한 잠재성의 역설과 그에 대한 또한 여전히 역설적 극복(비-잠재성의 능력)에서 그리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여전히 케이지의 작품들은 침묵하기 보다는 소리를 낸다. 이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소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이상의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봐야하는데, 이는 우리가 작품의 연주(performance)의 차원과 관련시킬 때에 특히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실 작곡가 자신에게 불확정성(indeterminacy)은 분명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 침묵'이다. 가장 극단적인 불확정성 속에서 작곡가는 어떤 소리도 생각할 수 없다. 이때 불확정성은 잠재적으로 모든 소리인 동시에 모든 소리의 비-잠재성으로서 거의 완전한 무음상태다. 하지만 그러한 불확정성이 연주자에게도 동일하게 침묵일 수는 없다. 연주자는 여하튼 소리를 만드는 행위를 해야 한다. 심지어 <4분33초>에도 연주자에게는 지시사항이 주어져 있고 연주자는 음향적 관점에서는 최소치에 가깝지만 어쨌든 행동을 해야 한다.

음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활동은 작곡, 연주, 듣기다. 만일 연주의 독립적인 차원―연주 자체, 그리고 작곡과 연주의 관계에 존재하는 불확정성의 독자적 차원―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침묵을 듣기를 통해 작곡과 같은 순수하게 지적인 활동과 연결시키기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낭시(Jean-Luc Nancy)는 ―아마도 아감벤이 주장하는 논리와 유사한 하이데거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듣기(listening)"라는 행위를 매개로 침묵과 음악을 연결시키는 사유를 진행시키는 최근의 대표적인 예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듣는다는 행위는 단지 (이미 이해할 수 있는 말의) 의미를 듣는 것(hearing)과 달리 "가능한 의미, 그리고 따라서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의미를 향해 전념함"을 뜻한다.이와 같이 두 가지 의미의 듣기를 구분하는 것은 곧 "듣기(listening)"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의미와는 다른 어떤 것을 듣는 행위라는 것을 나타낸다.

불확정성과 관련하여 케이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일종의) 부정적인 의미의 자유를 기계적인 과정―필연적이자 우연적인―을 통해 제거하여 예술가를 탈신비화하면서도 여전히 예술적 창조가 가능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그는 펠드만(Morton Feldman)과의 대화를 인용하면서 예술적 자유의 신비화에 대한 강한 반감을 보여준다. '새처럼 자유로운' 예술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확정성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 불확정적 작곡과 연주의 관계: 케이지는 작곡에서의 불확정성이란 바로 연주(performance)와의 관계에서 불확정성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작곡은 필연적으로 실험적이다. 실험적 행동이란 그 결과가 예측될 수 없는 행동을 뜻한다. 그리고 예측될 수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위는 별도의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의미에서의, 즉 작곡과 연주의 관계에서의 불확정성은 단순한 우연성과는 다르며 어떤 점에서는 즉흥성에 가깝다. 작곡가 브라운(Earle Brown)은 즉흥연주 기타리스트 데릭 베일리(Derek Bailey)와의 대화에서 즉흥성과 우연성의 차이를 구분하는데 초점을 맞추는데 여기서 그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연성의 음악(chance music)이 기대고 있는 '우연적(aleatory)임'은 "주사위 던지기"와 같은 의미이며, ―브라운이 보기에― 존 케이지의 작곡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주사위 던지기, 혹은 동전 던지기를 통해 결정하는 선택이란 작곡가의 의도적 선택 가능성 자체를 제거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우연성이란 선택과 결정을 기계적인 과정에 맞기기 때문에 연주자와 음악가에게는 "어떤 선택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흥성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물론 케이지가 즉흥성을 불확정적인 구조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간주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즉흥성 자체보다는 즉흥성을 촉진시키는 보다 구조적이고, 따라서 즉흥성 자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외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들에 더 주목한다. 예를 들어 즉흥성에서의 연주자의 판단과 결정, 선택의 근거를 무의식이나 신화적인 요소들에서 찾는다거나, ―이는 그의 의도적 비의도성의 실현에서 매우 중요한 방법인데― 연주자들의 공간적 배치를 통해 기존의 음악적 문법으로의 회귀를 막으려고 시도하는데, 이들은 사실 연주 자체에서의 즉흥성의 요소를 찾기보다는 즉흥성이나 불확정성을 실현하는데 장애가 되는 요인들을 구조적으로 제거하려는 의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케이지의 관점은 여전히 침묵 도입 이전의 전통적이고 낭만적인 작곡가의 관점이라고 봐야한다.

(2) 연주자 사이의 관계/연주자 배치의 불확정성: 불확정성을 확대하고 실현하기 위해 케이지는 연주자 사이의 관계와 연주자의 공간적 배치에 주목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뮤직서커스"로 대표되는 '서로 연관되지 않은 의도'를 동시에 동일한 공간에 배치시키는 방식이다. 반드시 이질적인 의도를 동시에 배치하지 않더라도 연주자의 공간적 배치 만으로도 불확정성을 실현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는 연주자가 충분히 먼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개별 연주자의 음향이 "유럽적 하모니의 관습과 음향간의 관계와 간섭에 관한 이론에 의해" 방해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렇게 될 때에만 연주자는 "공간 속에서 앙상블"을 이루며 각자의 이질적인 의도에 따라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3) 악기와 연주자 관계의 불확정성: 아마도 불확정성의 음악의 연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바로 악기와 연주자의 관계와 관련될 것이다. 케이지는 '우연성의 음악'의 방법이 곧 "인과관계가 단절된 악기를 이용한 즉흥연주"라고 말한다. 사실 즉흥성의 핵심에도 "악기에 관한 [비-관습적] 충동"이 존재한다. 비즉흥연주자에게는 이러한 충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매우 특징적인데, 그것은 연주자나 작곡자 자신의 "악기에 대한 조사"와 "탐구"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작곡가나 연주자는 악기를 단순히 예측 가능한 결과를 산출하는 "도구"로 인식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악기가 이렇게 이해되고 연주될 때, 악기가 연주되는 환경까지를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폭넓은 "우연성이란 악기에 대해 행사되는 통제력의 정도에 따라 활용될 수" 있게 된다.

사실 악기의 발전에 의한 도구주의적 접근의 탈신화화 가능성은 케이지 자신에 의해 매우 이른 시기부터 감지되었다. 그는 1937년에 쓴, 분명하게 미래주의적 색채가 느껴지는 글에서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음악은 악기의 발전 특히 전기를 사용하는 악기의 등장으로 더 이상 이전 시대에 악기와 맺었던 신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음악은 이제 "음향의 조직화"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전기악기 발명가와 연주자에 대해 케이지는 그들이 새로운 음악의 형식에 공헌하거나 혁신시키기 보다는 과거의 방식을 모방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기술의 발전에 따른 악기의 변화는 기존의 음악의 범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음악적 소리의 범위를 벗어나는 음향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증폭시키며, 이는 "듣기(listening)"라는 행위의 규범적 의미를 넘어서는 '다른' 의미의 창출과 관련된다. 동시에 이러한 악기가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은 음향이 전기적으로 생성된 것이기에, 행위의 결과이자 원인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지표'이자 결과로서 음향의 의미를 넘어선다. 악기와 연주의 관계 안에서의 불확정성에 대한 긍정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혹은 극도의 수동성의 표현으로서 침묵만을 듣게 될 것이다.


4. 실험음악과 즉흥성

침묵과 불확정성에 대한 케이지의 입장에서 우리는 낭만적 주체와 도구적 주체 모두에 대한 거부(양자 각각에 상응하는 예술가적)와, 주체의 신화화 혹은 주체의 역사화 모두에 대한 강한 부정을 읽을 수 있다. 작곡에 있어 불확정성과 연주의 즉흥성은 예측할 수 없고, 또한 동일하게 다시 재연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반복 불가능한 앙상블을 만들어낸다. 특히 즉흥성이 특정한 음악 장르의 관습적으로 용인되는 범위 안에서의 즉흥성이 아니라 아예 이를 벗어나는 자유로운 "비-관습적 즉흥성(non-idiomatic improvisation)"으로 이해될 때, "실험적" 작곡과 연주는 결코 어떤 새로운 것을 산출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기존에 이뤄진 것들과 비교해서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음악적 시간성의 창출이다. 신화적 시간이 끊임없이 무한히 먼 과거를 참고한다면, 그리고 역사적 시간이 비가역적이지만 동질적인 시간의 지속을 전제한다면 불확정성과 즉흥성의 시간은 끊임없는 현재라는 시간성 속에 있고, 이를 반복적으로 창출한다.

통상적으로 볼 때, 작곡가에게는 창조를 위해 (형식적으로는) 무한한 시간이 주어져 있는 반면 불확정적 작곡과 직결된 즉흥성의 실현을 위해서는 경험적으로 오직 유한한 시간만이 주어져 있다. 불확정성과 즉흥성은 그것이 실행되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된다. 그러나 우리가 양자의 시간성이라는 측면으로 접근할 때, 한편으로 그 관계가 전치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형식적 무한성과 대립하는 것은 현재의 영원성이다. 카듀(Cornelius Cardew)가 인용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말처럼 우리가 "영원성을 시간의 끝없는 지속이 아니라 시간 자체의 무한성(Unzeitlichkeit)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영원성을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즉 작곡가에게 형식적으로 주어진 자유가 시간의 무한한 지속에 가까운 것이라면 일단 불확정성과 즉흥성의 시간성 속에서 자유란 시간의 형식적 무제약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결국 실험이란 현재 속에서만 가능한 것으로서, 심지어 존 케이지 자신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되고만다.
 

John Cage performing "Water Walk" in January, 1960

Nam June Paik, <Tribute to John Cage>, 1976

EX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