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 푸티지의 목소리

윌리암 C. 위스

1991년 이른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나는 파운드 푸티지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는 7명의 영화감독과 대화를 나누었다. 꽤나 비공식적이고 다양한 주제에 관한 대화를 통해 나는 파운드 푸티지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혹은 특수하게 개별적인 영화감독들의 색이 묻어 나오는 집약된 말들을 취합했다. 많은 면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은 브루스 코너의 영향력 있는 작품인 <영화A Movie>가 1958년 등장한 이래로 파운드 푸티지 작업을 하는 많은 수의 영화감독들의 태도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뉴욕에서 난 에비게일 차일드Abigail Child, 키스 샌본Keith Sanborn, 레실 톤튼Leslie Thornton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6개의 파운드 푸티지 작품이 포함된 차일드의 연작인 <Is This What You Were Born For?>(1980~1987)의 여섯 번째 작품인 <소란Mayhem>과, <은밀한 행위Covert Action>는 오로지 발견한 푸티지로 만든 작품이다. 샌본Keith Sanborn의 <자본!KAPITAL!>(1980~1987)은 필름으로 하는 라이브 퍼포먼스로 시작해서, 여러 대의 영사기 상영으로 마무리되는 7개의 파운드 푸티지 작품이 포함된 연작이다. 샌본은 또한 르네 베넷 Rene Viénet의 <detourned>, 쿵푸 필름인 <La Dialectique Peut-Elle Casser des Briques?>(1972, 1990)에 영어자막을 만들었다. 톤튼Thornton의 비디오와 필름 설치 연작인 <Peggy and Fred in Hell>(1984~1990)은 파운드 푸티지와 촬영 장면이 결합된 작품이다. 현재 그녀는 파운드 푸티지를 사용한 후기 빅토리아 시대 작가인 이사벨 에버하르트Isabelle Eberhardt에 관한 극장용 장편을 완성 중에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는 미국을 대표하는 파운드 푸티지 작가인 브루스 코너와 인터뷰 했다. 부르스 코너는 최근 <America Is Waiting>(1982)을 완성했고, 1958년 이래로 12작품을 만들었다. 또한 최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안 예술 공간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소개되며 주목받고 있는 크랙 볼드윈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RocketKitKongKit>(1986), <Tribulation 99>(1991)를 만들었으며, 최근에 완성한 <O No Coronado!>(1992)는 자신이 촬영한 장면과 푸티지를 혼합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칙 스트랜드Chick Strand를 만났다. 브루스 코너처럼 그녀는 파운드 푸티지 작업을 하는 대표적인 미국 실험 영화 작가이다. 1967년에 그녀는 처음으로 파운드 푸티지 작품인 <Waterfall>(1967)을 만들었고, 1979년 작인 <Loose Ends>는 내가 보기에 그녀의 최고작이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캐나다의 영화감독인 데이비드 리머David Rimmer는 1970년대부터 파운드 푸티지 작업을 해오며 현재까지 세 작품을 만들었다. 리머는 밴쿠버 근처에 지내고 있지만, 나는 그가 몬트리올에 방문했을 때 간략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대화를 했던 감독들의 말을 잘 전달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다소 광범위한 주제에 걸친 이야기들을 편집할 수밖에 없었다. 구어적 표현에 따른 일상적 어구나 표현 등을 없애고, 내가 인터뷰한 목적에 맞도록 편집했다. 또한, 작가들의 표현상 맥락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내 질문과 말들은 삭제하였다. 예들 들어 원래 했던 대화들을 일관성과 생각의 흐름에 맞도록 순서를 바꾸고, 교정했다. 
나는 자신들의 작품과 다양한 주제에 걸친 관심들을 이야기 해준 작가들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싶다. 작가들이 출판을 위해 미리 준비된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그들은 내 질문에, 자신만의 생각으로 답을 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작가들 역시 자신의 생각을 바꿀 권리가 있다.

크랙 볼드윈 Craig Baldwin

우리는 많은 이론적 배경을 공부한 동시대의 젊은 영화감독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감독의 경우와는 다르고, 더욱이 나 자신을 가라지 필름메이커라고 부르고 싶다. 도구를 닥치는 대로 써서 만들기, 임시 변통의 물건, 피폐하게 하는 차고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맹신적인 것들에 관해서 말하려고 한다. 우리는 후기 산업사회 문화의 폐허 속에 있고, 이 속에는 오래된 상업 영화들, 트레일러들과 같은 것에 나오는 모든 장면들의 가치를 던져 버리고, 마치 뉴기니아와 같은 곳에서 비행기나 다른 것을 신성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처럼 다만 새로운 방법으로 그것들을 재생시키고 재창조 하려는 노력만으로 가득한 사회에 살고 있다.

난 많은 이론적 정당화에 동조하지만, 수년 동안 상업영화에서 일했던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파운드 푸티지 작업을 하게 되었다. 난 포르노 극장에서 일을 했지만, 포르노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다. Market Street 극장이었는데 그들이 B급이나 장르 영화라고 부르는 영화들을 상영하는 그런 곳이었다. 난 그곳을 사랑했고, 영화를 보고 또 보고 그랬다. 난 편견 같은 건 전혀 없었고 당신도 알겠지만, 난 필름이 셀룰로이드 위에 화약약품으로 만들어진 이미지 조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난 조형적인 것들이나 콜라주, 더욱이 시각 예술에 대한 접근 방법들에 더 친숙해 있었다. 난 필름을 만지작거리고 자르기 시작했다. 난 종이 위에 콜라주 하기도 했다. 내 접근방법은 불모지 혹은 예술계의 변두리에 있던 내 상황과 관계되어 있다.

공적인 미디어에서 이미지를 취해, 미디어에 대항할 수 있는 이미지로 사용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첨예한 지점에 있다. 난 정치적 성명의 일종처럼, 모든 정당화를 좋아한다. 그것은 전복적이며, 언더그라운드 운동의 일부로, 나 역시 항상 정치적 행위를 해왔다. 난 언더그라운드 운동이라는 영화를 다시 사용하고 싶다. 사람들은 더 이상 언더그라운드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실험”이라는 말 보다 더 무의미한 “아방가르드”라는 말을 사용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학계에 충당되는 모든 예술 세계는 주도권을 잃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지각 표준화와 문화의 상품화를 거부하고 거절하는 하위문화를 표현하는 필름을 좋아한다. 그것은 도전의 예술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의 이미지를 갖거나 훔치거나, 사용할 수 있고, 그 이미지로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다. 게다가 충분히 그것을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미지는 도처에 널려있다. 길을 걷다 보면 버스 광고판, 그라피티, 비행기 등 우리 발아래 어디에든지 이미지는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는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난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뭔가 만들어 낼 힘을 가지고 있고, 의견을 말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다. 그것이 궁극적 정의이다.

이런 태도의 기저에는 가난하고, 타락하고,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나의 위치가 있다. 난 필름을 만들 생각을 했고, 돈이 많지 않아 지원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너무 취약했다. 난 예술계와 산업적 시장에 대해 가지고 있던 악의를 버리고 성질을 죽여야 했다. 난 주류 예술계 사람들과 작업을 했고, 내 필름은 상당히 거칠고 못난 것들 이었다. 작품 속에는 불협화음과 빈정거림, 미학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이 표현된 나의 기질적 태도로 가득 차 있었다.

후에 내 작품은 학자, 비평가들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미학화되었다. 그들은 작품을 실재세계에서 끌어내려 틀 속에 넣고 이론적으로 이야기했다. 난 공동체 안에서 일하고 있고, 거대한 대중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 공연을 보러온다. 갤러리에만 집착하지 않고 대안 공간과 같은 모든 장소에서 공연한다. 난 상업적 미디어와 관계된 사람들, 예술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 등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 상영을 했다. 대안적 운동이나 대안적 하위문화는 좋은 예술가가 되려하지도 않고, 태도에 신경 쓰는 부르주아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펑크와 같은 태도, 이미지를 훔치는 것과 같은 비판적인 태도 등을 통해서 가능하다.

형식적 실험 역시 좋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영역으로 갈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더 많이 하고 있고, 그들은 관객들을 존중하고,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금방 지루해지기 때문에 아주 미미한 실험영화 감독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제 케케묵은 것이 되어 버렸고, 그들은 단지 시각성에 기반을 둔 망막적인 것들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샌 프란시스코 (1991년 5월 20일)


에비게일 차일드 Abigail Child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태어난 나와 같은 세대의 영화감독들은 어릴 적부터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라왔다. 우리는 쉽게 미디어에 영향 받고, 어떻게 우리의 세상이 미디어에 의해 영향 받는지 알고 있다. 70년대에 우리가 만들었던 구조영화들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던 것이다. 우리가 해온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감정적 이미지들, 우리에게 뭔가 강력하고, 파장을 일으키는―단지 아무것이나 취합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무엇을 말하고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독되며 실질적으로 이미지 표상과 해독의 흐름들에 접근하려고 했으며―그러한 표상하는 이미지들을 조금 더 반복, 비 접합, 물질성과 같은 형식적인 생각들로 구조화시켰다. 남루하고 세련되지 못하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들의 낙관주의나 60년대 혁명적인 정신적 이상주의, 여성주의 들의 조합의 정점에 구조영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각자는 다르겠지만.

편집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파운드 푸티지에 접근하는 게 훨씬 쉬웠다. 영화 속에서 장면들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게 될지, 어떤 것이 마지막에 아름답게 보일 것인지, 어떤 것이 마지막에 추하게 보일 것인지, 혹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자신만의 푸티지를 통해, 우리는 이것들을 다양한 작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선험적 감정들을 갖게 된다. 우리는 모든 재료들에 관해 이러한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 당신이 결국에 보는 것은 실재 영사되는 이미지들이다. 이후 영화에 잘 들어맞는 푸티지를 고르기 위해 10시간이나 허비할 수도 있고, 점점 더 “이건 좋은데, 이건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는 태도를 가지고 나는 내 자신 만의 푸티지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은밀한 행위Covert Action>는 리빙 시네마The Collective for Living Cinema의 필름 보관소에서 얻은 푸티지를 사용했다. 내 동료가 그곳에 처음 갔었기 때문에, 약 1000ft 정도 길이의 필름을 두 형제가 여행가서 촬영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두 형제가 여행을 간 것인지, 주말에 혹은 여름철에 다른 여성들과 함께 한 것인지 전혀 알지는 못했다. 필름은 매우 친숙하면서 동시에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두 명의 여성이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녀들은 자신들이 마치 사물들처럼 자진해서 렌즈 앞에서 대상화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굉장히 친숙한 것이지만 동시에 소름끼치는 일이기도 하다. 2년이 지난 후에야 나는 필름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고, 매우 제한된 필름 스트립―아마도 400ft가 되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100ft 정도만을 사용했다―을 가지고 행위들을 반복하여 리듬을 갖도록 만들었다. 이를 통해서 필름 속에는 신체의 움직임, 자세, 접촉만이 남아 있었다.

원래 필름을 재가공하는 과정에서 다큐멘터리는 “픽션”의 일종으로 바뀌었다. 나는 내가 가진 재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원래 필름과 어떠한 관련성도 없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나는 <은밀한 행위Covert Action>를 통해 이런 형태의 서사적 탐구를 최초로 시도했다. 

<자비Mercy>를 작업할 때 내가 가진 필름 재료의 모든 측면을 알고 있었다. 교육용 필름과 과학에 관한 필름이었고, 난 이 필름들이 가진 의미를 전복시키려 했다. 나는 과학적‧“객관적”‧당신에게 질문을 요구하지 않는 광고 푸티지이거나,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매우 다른 것을 기록한 푸티지들, 미국문화 중심부에 이름 없는 이데올로기일지라도 필름이 가진 본질적인 측면, 원래 가지고 있던 형식들 속에 감추어진 의미들을 밝혀내기 위해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런 측면에서 <자비>는 이미지 자신의 역사를 “포기”하게 만드는 기록의 고고학이다.

멕시코와 뉴멕시코, 대학에서 인류학자로 일했던 경험을 통해서 나는 “실재”와 “사실”을 표상하게 되는 힘에 관해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교육을 통해서 배우진 않았지만, “진실”이라는 것에 여러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화감독이자, 편집가로서 나는 이미지를 전복하고 발굴하고 탈환시키려 노력했고, 표상의 한계를 탐구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미지속에서 치우침, 아름다움, 그것이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공포감과 같은 모순점들을 끄집어 낼 수 있을까 질문했다. 

<소란Mayhem>은 사운드에 영감을 받았다. 물론 전에도 작품 속에 사운드가 몇 가지 있었지만 <소란>은 특히 사운드가 이미지를 춤추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졌다. 대본이 없지만, 사운드는 내 대본이 될 수 있었다. 처음 나는 케이블 TV나 라틴 솝 오페라들의 사운드를 녹음해서, “질투” “분노” “기대” “로망스” “두려움” “멜로드라마” 등을 나타낼 수 있도록 작품 속에 사용했다. 당신은 사운드트랙에서 기대했던 것과 역사적 질감을 가질 수 있다. 우선 나는 사운드가 없는 컷들을 자르고, 그런 다음 사운드가 다시 개입하게 되고, 모든 컷들이 붙여지면 전혀 다른 영역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것이 기본적인 구조이고, 이 밖에도 사운드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뉴스, 기계 소음 들을 녹음해서 작품에 사용했다. 목소리가 나오는 트랙은 매우 특이 했는데, 예를 들어 여자가 옷을 벗으려고 할 때, 옷은 벗을 수 없고 자동차 급정거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짧은 자막이 “안 돼, 안 돼”라고 나오는데, 실재 우리에겐 “돼, 돼”라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나는 이번에는 사운드를 통해서 이미지를 전복했다. 사운드는 내가 비틀고 싶던 이미지들에 대한 해석을 뒷받침 했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마음속에 읽혀지는 것을 복잡하게 하고, 구축된 사실들로부터 관객들을 밀어내기 위해 나는 작품이 가진 최초의 신뢰를 빗겨나가게 만드는 몇 가지 전략들을 사용했다. <소란>은 모두 내가 촬영한 장면으로 만들어졌다. 나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시도들을 통해 정형화된 것들을 깨기 위해 노력했고, 1년 반 전에 촬영한 필름에, 내 방식대로 파운드 푸티지를 이용했다. 하나는 스프라킷 구멍이 깨진 프랑스의 낭만적 이야기의 네거티브 이미지이고, 다른 필름은 결혼 후에 남성의 정체가 외계인으로 밝혀지는 영국의 공상과학 영화였다. 세 번째 필름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프랑스 게릴라 군을 심문하는 내용이다. 어떤 지점에 난 내 자신에게 이것들을 포함시키려고 했고, 편집을 시작했다. 

난 조합에 관심이 있는데, 출처를 숨기거나 컷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언극” 픽션인 시각적 조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은밀한 행위>에서 서부 여성의 입 모양에 에스키모인의 목소리를 잘못 더빙한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소란>의 주제중의 하나는 서사적 구조의 유혹과 관음증에 관한 것이다. 난 환상과 컷들이 느껴지는 움직임에 관한 영화를 향한 나의 애정을 담은 풍경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파운드 푸티지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난 롤을 분리해서 놔두지만, 각각의 롤들은 마치 실처럼 전체 필름을 만들어내게 된다. 작업과정의 측면에서 내 작품은 브래키지나 프램튼의 작업과 연결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나선형 모양으로, <소란>은 <은밀한 행위>, <자비>와 같은 형태를 가진다. 이미지는 계속해서 등장하고 추가되며, 계속해서 발전시킬 수 있고 첨가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풍부하고 열린 구조이며, 우리의 의식이나 기억처럼 변하지만 다시 연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은밀한 행위>에서 이야기는 탈선과 상실에 의해 전개된다. 나선은 포섭된 이 공간에 적합한다. 

파운드 푸티지는 과거의 영화와, 세계의 이미지들의 잠재적 아카이브이다. 내가 절대 접근할 수 없던 방식이 파운드 푸티지를 통해서는 가능하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우리 뇌의 풍경이다. 난 보여진 것들의 민속지학, 풍경에 접근한다.

뉴욕 (1991년 2월 11일)


브루스 코너 Bruce Conner

나는 항상 주류, 산업적인 영화 흐름의 외부에 속해 있었다. 나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실험experimental․언더그라운드underground․독립independent 영화―지금은 이름이 많이 바뀌고 있지만―등으로 불리는 환경 속에 있었다. 나는 내밀함 내에서 제한된 대화의 외부에서 아방가르드 혹은 비과학적인―종교적인 사회 형식을 통해서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필름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나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내 경험상 1958년 이전까지 <영화A Movie>와 같은 필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작품과 관련지을 수 있는 작품들이 있다면 그것은 실험영화 외부에 있었다. 나는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는데, 할리우드의 ‘Poverty Row’에서 만들어진 싸구려 삼류영화들을 보았다. 그곳에는 계속해서 같은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짧은 필름들을 보관해 놓은 푸티지 라이브러리가 있었다. 뉴욕이라는 장면설정이 있다면, 항상 브룩클린 다리의 같은 위치에서 촬영한 같은 장면만을 볼 수 있었다. 외부 로케이션과 같은 경우는 최소한의 세트와 무대장치 등으로 그곳임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고전적인 진부한 표현이 있었다. 또한 그것은 야외촬영 보다는 스튜디오 안에서 촬영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조잡한 스크린 프로세싱과 같은 것을 통해 촬영했다. 사람들은 정말로 영화a movie 앞에서 걷고 있었던 것이다! 카우보이들이 창을 잡고 겨누는 장면들은 이미 대규모 프로덕션을 통해서 촬영된 장면에서 가져와 사용했다. 인디언들이 공격하는 장면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그래서 난 언제나 만들어 질 수 있는 “보편적인 영화Universal Movie”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고전적인 이미지들이다. 필름 속에서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것은 모나리자이고, 천지 창조의 그림이며, 자유의 여신상이다. 그것들은 모두 상징이다.

<영화A Movie>라 불리는 필름을 만들게 된 건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게 영향을 준 다른 것들이 있다면 새로운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된 2~3분짜리 예고편이 있다. 더욱이 특별히 내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1920년대부터 활동했던 여배우인 바바라 스탠윅Barbara Stanwyck이 남자 얼굴에 유리잔의 물을 쏟아 버리며 “난 당신이 싫어요! 난 당신이 싫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다음에 철로 위의 기차가 절벽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이어진다. 주말에 나는 마지막 시퀀스가 모든 사건들의 결말이 주인공이 영웅에게 비참한 상황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모험이 가득한 연속극을 보았다. 하지만 영웅은 살아남았으며, 아마 이미 벌어진 사건을 무시하거나 그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내겐 사회적으로 합의된 서사적 구조와는 완전히 다른 감정적 반응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들 그것이 심각하지 않거나 예술이 아니라 해서 버려지는 것들에만 항상 나는 관심을 기울였다. 60년대까지 이러한 태도는 마치 새로운 발견인 것처럼 팝 아트라 불리는 구조라 이야기 되었다. 하지만, 팝 아트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철학적 전제를 따르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우리 문화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다면 예술가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살펴보면 된다. 미국에서 나는 내가 속한 문화를 낯설게 받아들인다. 즉, 그것은 나의 문화이지만 난 그렇게 느끼지는 않는다.

<영화A Movie>의 또 다른 영향은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의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릴 때, 소리 없이 화면을 보거나, 다른 사운드를 첨가해서 보는 경험들. 나는 영화를 막스 형제(1920~1930년대 슬랩스틱 코미디로 유명한 배우)의 하포가 도움을 요청하고 모든 다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을 불러 모으는 1933년 작품인 <오리 수프Duck Soup>의 장면처럼 짧은 푸티지로 본다. 극장에서 보이는 짧은 장면들은 뉴스릴 푸티지를 사용하여 다른 장면과 섞고 다른 사운드를 첨가하여 변형시킨다. 스파이크 존스(린들리 암스트롱 스파이크 존스)와 그의 도시 슬리커His City Slickers는 공연 중 무대에서 패러디를 했다. 그들의 유명한 작품은 경주에서 항상 맨 뒤에 달리는 경주마에 관한 독백이다. 피틀바움이라는 말을 제외하고 모두 승자로 발표된다. 마지막에 당시의 퍼포먼스를 봤는데, 스파이크 존스는 무대에 이미지를 영사했다. 말 경주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경주용 차, 애처롭고 늙어 휘청거리는 피틀바움이라는 이름을 가진 말이 있었다. 영화 속에는 피틀바움과 자동차 경주 푸티지가 번갈아 가면서 등장했다. 굉장히 코믹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는데, 단순한 방식이었다.

내가 <영화A Movie>를 만든 이유는 누군가 내 마음에 명확하게 다가오는 영화를 만들기를 기다려 왔기 때문이다. 나는 1940년대 영화 속에서 “꿈 장면”이라 오인되는 평범하지 않은 짧은 장면을 보고 “실험”영화라 불리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환상 장면은 가끔 주인공이 현실과 비슷한 꿈을 꾸는 장면을 제외하곤 극장용 극영화 속에선 볼 수가 없었다. 일상적인 장면에서 이상한 변화들이 발생한다. 이미지는 포지티브 대신 네거티브, 느린 동작, 극도로 빠르게 사용되었다. 문이 열리면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일이 벌어진다. 이런 변화된 장면들은 짧은 푸티지를 자주 사용했던 저급한 할리우드 영화들과 유사하다. 그래서 나는 1940년대 이런 영화들을 많이 보았다. 14살 때 나는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난 좀더 “초현실적인” 영화를 보고 싶었고, 상업영화들은 거의 보지 않았었다. 

난 캔자스 주에 있는 위치타 필름 소사이어티Wichita Film Society에 가입했고,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그곳에서 초현실적인 필름을 2~3 작품을 보았다. 후에 나는 내가 보고 싶은 필름들을 보기 위해 새로운 그룹을 조직할 필요성을 느꼈다. 1956년 콜로라도 대학에서 처음 실험영화그룹을 시작했을 때 난 스탠 브래키지와Stan Brakhage의 만남을 추진했다. 난 이미 1950년대 초반에 해리 스미스Harry Smith를 만났지만, 해리는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는 것을 꺼려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도용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난 1960년대 중반까지 해리 스미스의 필름을 전혀 보지 못했다. 난 시네마 16의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내가 1957년 이곳으로(샌프란시스코) 왔을 때 난 내가 아는 한 북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 불리는 유일한 필름 소사이어티에서 래리 조단Larry Jordan을 만났다. 래리는 나에게 스플라이서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난 그가 가진 스플라이서, 리와인더, 뷰어 등을 사용했다. 난 근처의 사진가게에 가서 “Hopalong Cassidy”와 같은 상업용 16mm 필름 100ft 롤, 뉴스릴, 자동차 경주 장면이 담긴 필름과 같은 것들을 구입했다. 이렇게 해서 푸티지에 가까이 갈 수 있었고, 나는 TV 광고 필름, 가정용 영화, 옛날 영화등 내가 찾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구입했다. 난 카메라를 살 수 없었고, 사실 몇 백ft의 필름을 구입하고 촬영한 후 현상하는 것 보다, 이미 현상되고 프린트로 만들어진 필름을 사는 것이 훨씬 저렴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영화들이 만들어 지지 않았기 때문에 난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 학교에서 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배운 적은 전혀 없었다. 학교에서 영화제작 수업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난 내 영화를 만들 방법을 창조해야만 했다. 내가 배운 모든 것은 필름 조각들을 붙일 수 있는 방법 뿐이었다. <영화A Movie>는 편집을 통해 가능한 가장 원시적 형태의 필름이다. 단지 붙이기만 하면 되었으며, 난 프린트도 없었고, 싱크로나이져, 무비올라, 사운드 리더기와 같은 장비도 없었고 오늘날 학생들이 필름을 시작할 때 익히 알고 있는 기술적인 방법들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7년에 완성된 이후로 <영화A Movie>는 여전히 학교에서 필름 수업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내가 <영화>를 제작한 방식은 누구에게도 가르쳐진 적 없는 것이다. 

내가 이런 영화들을 만들 시절에, 난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갖고 보았다. 영사기를 구입하고 나서는, 영화를 계속해서 다시 돌려보고 돌려 보았다. 반복해서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뷰어를 가지고 손으로 필름을 돌리면서 앞뒤로 반복해서 보거나, 멈추고 프레임을 자세하게 보면서 분석했다. 교육용 필름이나 여러 종류의 필름을 가지고 작업을 하면서 내 마음속에 회상을 불러일으키거나, 모순되고 기묘한, 흥미로우면서 호기심 가는 내가 버릴 수 없는 이미지들을 생각했다. 모든 푸티지들의 사이사이를 잘라내자, 릴은 갈수록 짧아졌다. 때때로 이미지들은 여자 배우가 남자의 뺨을 때리고, 기차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장면처럼 우연하게 다른 이미지들과 유사한 정서적 맥락 속에 서로 잘 어울리는 경우가 있었다. 서로 다른 장면들의 상징적 움직임은 정서적이며 더욱이 불가해한 것이다. 나는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로 어떤 장면의 이미지를 선택하고, 나를 매혹시키는 이미지를 제외하고 그것들이 어떤 것을 표현하게 될지 모르지만 난 이미지를 남겨두었다. 많은 경우 영화를 만들 때 나는 개별적인 장면들이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게 될지 의식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이미지들이 어떤 것을 표상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난 <리포트REPORT>(1967)의 제작을 시작했다. 작업은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작업과정은 페인팅, 조각과 같은 몇 가지의 다른 형태의 필름들로 변해갔다. <리포트>는 원래 필름을 5년 정도 변화 후에 편집을 거쳐 이를 다시 네거티브로 만든 것이다. 각각의 프린트들은 같은 사운드트랙으로 편집되었다는 것 말고 모두 달랐다. 암살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압력에 의해 미디어에서 변화되었다. 한 남자가 총을 맞아 죽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사실로 다가왔다. 그 죽음은 종교적, 부족적 관찰로 점차 객관적 대상이 되어갔다. 거의 즉각적으로 케네디가 반대 했던 정치적 행위들을 촉진시키기 위해 나쁜 방식으로 그의 이미지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리포트>속에서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은 나 혹은 당신, 아니면 모든 사람의 죽음이기도 하다. 케네디는 그것을 상징화하는 인물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너무나 보편적이고 명백한 문화적 이미지가 되어 있었으며, 항상 죽음은 재이용되고 선전되고 신성시되었으며, 그 밖의 모든 것들이 그의 죽음 한 가운데 있었다. 그 토록 수없이 많은 카메라를 든 사람들, 리포터들, 목격자들이 있었지만, 모든 것들은 수천 명의 시점 속으로 파편화되었다. 

영화제작에 관한 나의 접근법에 있어 촬영을 하는 것과 다른 필름에서 푸티지를 가져오는 것이 별개의 것이 아니다. 편집자가 필름을 만들지 않더라도, 모든 푸티지는 편집자에게 있어 파운드 푸티지다. 내가 촬영을 하는지 안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기술적인 부분은 차이가 없다. 편집자의 역할은 주어진 이미지로 작업을 하고, 그것을 이어 붙이고, 아마도 원래 의도했던 것에는 전혀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이다. 문맥을 변화시킴으로 인해 푸티지가 얼마나 다양한 의미로 창출되는지 보여줄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사례들이 있다.

난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범주화하려는 경향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그리고 아마도 콜라주Collage보다는 몽타주가 더 가까울 것 같다. 왜냐하면 콜라주는 내가 이해하기로 평평한 표면의 종이위에 분리된 층으로 배치하는 걸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앙상블라쥬Assemblage는 프랑스어이자 영어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하는 용어다. 우리가 필름을 이야기 할 때 콜라주에 대해서 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몽타주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된다.

내 필름은 환상이 아닌, “사실의 세계”이다. 그것은 발견된 사물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내 주변에서 보던 현상들이다. 이것이 내가 “사실의 세계”라 부르는 이유이며, 우리는 정기적으로 “리얼리티 쇼”를 접할 수 있다. 가장 널리 퍼진 것 중의 하나는 5분 뉴스이다. 만약 뉴스 프로그램을 라디오를 통해서 듣게 되면, 우리는 10개 정도 사건이 연달아 방송되는 걸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내 영화 <영화A Movie>와 다를 바가 없다. 당신이 정치적 혹은 사회적인 문제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지침 그 옆엔 의견이 그리고 그 다음엔 재난이 방송되는 건 뭔가 부조리한 것이다. 알다시피, “부시 대통령이 오늘 영부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메인 주 남부 케네벙크 포트로 갔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5만 명의 사람이 죽는 끔찍한 재난이 발생했습니다. 소니사에서 21세기에 내놓을 3차원 입체화상 텔레비전을 생산할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이어진다. 난 이것을 풍자적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샌 프란시스코 (1991 5월 22일)


데이비드 리머 David Rimmer

1960년대 후반에 나는 밴쿠버에 있는 인터미디아Intermedia(다양한 미디어를 동시에 사용하는)라는 그룹에 참여하고 있었다. 캐나다 국가 필름위원회National Film Board를 통해서나는 오래된 두 박스의 필름을 얻었다. 그래서 난 그 필름들을 가지고 뭔가를 계획할 수 있었다. 당시에 나는 필름 상영, 음악, 무용 공연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는데, 오래된 필름들을 가지고 루프를 만들어 퍼포먼스 중에 영사를 했다. <셀로판지 포장지에 대한 변주Variation On A Cellophane Wrapper> 는 퍼포먼스의 일부분으로 시작되었으며, 네 대의 영사기의 렌즈 앞에 색 필터를 덮어 색을 변화시키고 모두 같은 푸티지를 루프로 만들어 영사했다. 당시에 난 왜 내가 이걸 고정된 형태로 만들지 않을까, 완결된 형태의 필름으로 만들지 않을까라고 자문했고, 개별적인 루프들을 필름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완성이 되었다. 오래된 푸티지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고 추측하건데 그건 굉장히 놀라웠고 난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는 <Surfacing on the Thames>, <The Dance>와 같은 작품을 푸티지를 가지고 만들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푸티지들을 수집하고, 훔치고, 찾고 있다. 나는 수없이 많은 푸티지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편집하는 사람이다. 나는 편집이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내는 순간을 너무나 사랑한다. 내가 푸티지를 가지고 작업을 하게 되면 옵티컬 프린팅이나 다른 작업 과정이 내 손을 거쳐 새로운 작업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나의 푸티지라고 보통 느낀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어떤 사람의 푸티지가 아니다. 또한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변주한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 같은 것을 느끼지 않으며, 특히 아주 먼 과거의 어떤 사람의 것일 경우에 더더욱 그러한데, 그러한 점은 나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어떤 작품은 이미지의 해체라는 비평을 많이 받지만, 난 단지 이미지를 해체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변화를 통한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한다. 이 점 때문에 난 오래된 필름들을 전유한 그런 작품들을 좋아한다. 난 오래된 필름들을 정말 좋아한다.

몬트리올 (1991년 9월 19일)


키스 샌본 Keith Sanborn

난 언제나 파운드 푸티지 좋아했다. 난 언제나 브루스 코너의 작품을 좋아했다. 그리고 형식주의적 영화들의 많은 관심영역이, 70년대에 발전된 것처럼, 꽤 신중하게 꽤 현학적으로 내용을 제거하는 데에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흥미로운 것이기도 했지만, 아니기도 했다. 어쨌든, 형식을 위해 내용으로부터 무언가를 제거하려는 욕망은 나에게 막다른 길임을 알아차렸고, 왜 흥미로운 내용과 연관된 형식적 실험을 할 수는 없는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대를 거치면서 감수성의 변화가 도래한, 말하자면 형식상의 유토피아적 믿음으로부터 좀 더 비판적인 것, 즉 형식적 비판이 그 자체로는 적절하지 않은 믿음으로의 변화가 도래한 시점 또한 존재한다. 시각 예술의 다른 영역에 있어서 그 시기에 많은 것이 말해진 바 있는데, 그것은 소위 “전유된 이미지들appropriated images”란 것이었다, 소위 이러한 영화들, 이러한 예술작품들이 논쟁거리가 되었다. 난 언제나 내 작품을 더더욱 “착복된 이미지expropriated images”라 생각했었는데,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부르든 간에, 그것은 그러한 것들[영화들, 이미지들]에 대한 정치적 이해와 관련된 것이다. 파운드 푸티지의 인과적 초현실주의로부터 문화적 비판의 엄격한 기획으로서의 강탈détournement로의 기나긴 확장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난 강탈 쪽으로 기울었다. 물론 그것은 유희의 방식이긴 하지만. 

한 문맥으로부터 떼어진 이미지를 다른 문맥 속에 끼워 넣으면, 별일이 다 일어난다. 그것은 이미지 뒤에 감쳐진 문맥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추적하는 것이며, 나에게 재미있는 푸티지 영화와 재미없는 푸티지 영화를 구분하는 것 또한, 이미지에게 새로운 문맥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른 것이다. 난 브루스 코너의 영화, 특히 <영화A Movie>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은, 마릴린 몬로와 잠수함과 어뢰와 원자폭탄을 병치시킨 그 시퀀스처럼, 그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때이다. 그것이 바로 몽타주이다. 그 나머지 것의 대부분은 Castle Films의 이상한 장면들이다. 그것은 매우 재미있지만, 그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니다. 

우리 세대에 있어서 또 하나 지적되어야 할 것은, 비디오가 영원한 현재를 재현하는 반면, 필름은 역사를 재현한다는 것이다. 필름은 기억의 범주를 재현하는데, 그것은 TV나 비디오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앞에서 선행하는 것이다. 그밖에도 필름의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성질과 필름을 영사한다는 것의 사회적 측면 등이 있다. 필름이란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역사의 증거이다. 그것들은 만질 수 있다. 즉 즉물적이다. 파운드 푸티지 필름과 파운드 푸티지 비디오 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비디오의 경우 그 이미지들이 너무나 분명히 TV에서 온 것이지만, 필름의 경우, 그 이미지는 이미지들의 공적인 총체public body로 진입하는 출구를 함축하기에 좀 더 교활한 것이다. 그것들이 너의 이미지들인가 아니면 그들의 이미지들인가, 혹은 그 이미지들의 삼에 참여할 수 있는 너의 능력은 무엇인가 등등에 대한 권력 투쟁이 언제나 있는 법이다. 이 모든 것들이 또한 파운드 푸티지 영화들의 문맥과 의미의 관념에 연관된다.

파운드 푸티지는 역사의 매우 구체적인 형태와 같은 것으로 존재하며, 그러한 재료들로 작업해보면 역사를 검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바로 이것이 내가 매료되었던 부분이다: 역사 안에서 의미를 발명하거나 발견하는 것. 즉 기존 재료들로부터 어떤 것을 창조해내는 것. 다른 한편, 우리 세대에 있어서 형식적 실험은 막다른 길에 봉착했고, 이미 너무 많은 영화들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영화나 형식적 혁신이 아니라, 이미 저기 밖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더 잘 이해하는 것임을 느낀다. 내가 동시대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와 같이 말할지는 모르겠으나, 형식주의적 영화는 분명히, 기본적으로 매우 배타적인 영역을 고집하고, 그 멤버십은 더 이상 충원되지 않으며, 그 문은 닫혀버린, 막판에 도달했다. 누군가가 그에 속하고 싶다면, 그는 멤버십을 받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그는 정치적 투쟁, 오이디푸스적 투쟁을 떠맡게 된다. 

이것은 TV 세대의 문제와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그룹으로서, 우린 어떤 방식으로서든 이전 세대보다 더 시각적으로 교육받았으며, 그것은 질의 관점에서라기보다는 확실히 양의 관점에서 그러하다. 그러한 데이터의 홍수는 본다는 것의 다른 정치학을 요구하며,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본다는 것의 정치학은 시각 예술보다 더욱 핵심적인 이슈이다. 

물론 파운드 푸티징에 다소 재밌는 사용방법들이 존재하고,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욕망이 존재할 거라 생각한다. 만약 당신이 기존의 재료를 취했다면, 어떤 의미에선 당신은, 이상적인 비전이 수행될 수 있는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것보다 더 심도 있게, 그리고 더 즉각적으로 사람들의 의식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의 대중 신화학의 강요된 독해와 같은 것이고, 즉각적인 임팩트를 갖는다. 

파운드 푸티지 영화는 역사적으로 취약한 영화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파운드 푸티지 영화들은 다른 아방가르드 영화들보다 더 빨리 그 많은 뉘앙스를 잃어버렸는데, 그것은 이미지―한 이미지의 의미―가 시간을 거치면서 매우 급하게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스테르 슈브Esther Schub의 경우, 그녀가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The Fall of the Romanov Dynasty>를 만들었을 때, 짜르 일가의 푸티지나 소작농의 푸티지는 특정한 정보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자막은 매우 난해하지만, 재료를 많이 보충하지 않아도 그것은 역사적으로 읽힌다. 그 의미는 역사적인 것의 범주에 의해 고갈된 셈이다. 

가끔씩 파운드 푸티지 영화들의 초현실주의적 사용, 아시다시피, 학생 수준의 사용법은, 다음 것의 한 신기한 경우일 뿐이다. 즉 그것은 쿨레쇼프 효과의 저예산 버전과 같은 것이다. 당신은 마약을 하고 흥분해서 즐거울 수 있겠지만, 얼마 안 있어서는, 흥분해도 그다지 즐겁지는 않은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파운드 푸티지 영화들의 일반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정말로, 정말로 따분하거나, 아니면 진정 재미있거나이다. 움직여질 수 없는 대상들과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만나는 것이다. 

 뉴욕 (1991년 4월 16일)


칙 스트랜드 Chick Strand

<영화A Movie>와 그 안에 들어있던 가능성을 봤을 때, 난 낡은 필름을 가지고 작업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미지들을 끌어오고 재배열하고 콜라주를 한다는 것 등이 위험하지는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쓰레기를 발견해내는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내가 몇 벌의 프린트에서 가져온 조각들을 제외하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버려졌을 것이다. 난 이미지 자체와, 내가 그것에 얼마나 개입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조금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다른 문맥에 부착할 수 있다는 것에 매료되었다.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다. 그냥 한 문맥에서 떼어내서, 하위문맥적인 것들을 그 안에 남겨놓고, 모든 것을 다른 것과 완전히 뒤섞고, 하나의 문맥을 만들면 된다.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편집을 할 때, 난 모든 푸티지를 파운드 푸티지로 간주하곤 한다. 난 내가 취한 푸티지로부터 거리두기를 좋아한다. 편집한다는 것은, 내가 촬영할 때 갖는 감정적 개입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편집할 때, 내가 그것을 보내줄 수 없다는 이유로 어떤 것을 가둬두기 보다는, 전체로서 이것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좀 더 나은 시선, 좀 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기 위해 난 내 자신을 철회시킨다. 난 무자비해지도록 노력하는 셈이다. 

내 영화의 많은 부분들, 특히 파운드 푸티지 영화는, 영화 만들기와 영화 자체를 지시한다. 인류학자(난 영화를 만들기 이전에 인류학자가 되려고 했었다)로서, 나는 영화들을 문화의 인공물artifact로 간주하며,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아마도 ―좋은 예를 들어야겠다―아즈텍Aztecs의 법전Codex과 같은,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다른 이유에서 만들어진 옛날 영화들보다 더 로맨틱하고 더 이상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무엇일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지 인공물이며, 물질문명의 부분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 문화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방식을 통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고로 난 그것을 인공물이라 간주한다. 

그러나 또한, 법전처럼, 그것은 우리 역사의 부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내가 <Loose Ends>(1979)에서 사용한 머이브릿지의 작품의 한 부분은 우리 문화의 한 역사적 단편, 그 시대의 인공물일 뿐만 아니라, 운동에 대한 관념 전체와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동굴 안에서 토기를 발견해내는 것과 같으며, 우린 우리 뒤에 올, 고로 우리 시대를 살지 않았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것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편집할 때, 영화의 이러한 단편들은 인공물들이다. 지성적으로, 난 그것들을 인공물로 간주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나 또한 문화의 한 부분이기에 난 그것을 전적으로 다른 층위에서 바라본다. 내가 <Movietone News>를 볼 만치 어렸을 때의 2차 세계대전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내가 찍혀진 이미지들과 함께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Last Yeas at Marienbad>의 텍스트를 이용했을 때(<Loose Ends>의 결론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그러한 것들은 서로 관련이 없었기에 난 역사를 발명하고 진정 그 이미지들을 뒤섞었다. 그러나 내 생각엔, 그가 마리앵바드에 대해서 묘사한 방식, 즉 로코코rococo 식은 때때로, 우리가 스크린 위에서 보는 것―예를 들어, 전쟁 푸티지 속에 있는 공포감과 무시무시함―을, 로코코 대리석으로 돌려보내려고 지각하고 내면화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내 생각엔 [이러한 작업에 있어서] 진정한 즐거움이란 당신이 그 많은 것들을 뒤섞을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난 옛날 푸티지들을 취하기에 그저 꼰대일 뿐이다. 나에겐 그것이 더 중요하다. 즉 지금 세상은 미쳐 돌아가고 있다. 모든 것이 문맥을 잃었다. 우리는 콜라주 안에 살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1991년 5월 25일)


레슬리 손턴 Lesile Thornton

파운드 푸티지로 작업하는 방법들은 여러 가지가 있기에, 난 그에 대해서 성급한 발언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본 것들, 나에게 떠올랐던 것에 대해서는 말해볼 수 있다. 일례로 <Peggy and Fred in Hell>에서 그 아이들은 우리의 문화적 퇴적물로부터 환경을 구성한다. 고로, 옛날 웨스팅하우스 공장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삼 분 동안 보여주는 것이 프레드가 전화를 받고 TV 배우처럼 행동하는 것과 다르게 보이는 방법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프레드와 페기의 모든 행위들은 진정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난 이를 위한 일종의 전략artifice을 고안했다. 그러한 문화적 인공물artifact을 사용함에 있어서, 난 그것을 특권화하거나 강조하지도, 즉 그 역사성을 가치절하하지 않았으며, 단지, 내 작품에서 종종 그러하듯이, 동시에 많은 것들을 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것은 경박하게 다뤄질 지도 모르지만, 다른 한편, 중요한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재료들[푸티지들]이 한 작품에 있어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그것은 몽타주나 지속되는 이야기 같은 것 안에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고, 단지 그 환경적 요소일 수도 있다―에 따라, 그것은 중대하고, 무엇보다도 우선하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고, 동시에 매우 평범한 것일 수 있다. 

난 다른 사람들의 재료들을 사용하는 것, 즉 전유appropriation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봤다.만약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미적 경험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 재료들을 사용한다면, 난 어떻게든 그것을 어색한 위치로 바꿔놓고자 한다. 그러나 난 이것이 [푸티지에 대해] 매우 특정한 관점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자 한다. 난 그 역사적 현존성에 있어서 기록적 재료들에 관심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현존성을 평범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지, 절대로 그것을 스펙터클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은 스펙터클처럼 보일 수는 있는데,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당시 폭탄 투하 장면은 스펙터클하며, 말하자면, 그 원본에 있어서는 매우 다른 어떤 것을 미화한다. 그것은 마치 당신이 거기 있는 것처럼 폭탄 푸티지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어떤 것을 스펙터클로 보더라도, 그것은 지시대상을 가지고 있고, 그 지시대상이 거대하지만 그것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안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현재 안에서 읽어내지만, 그러나 우리의 현재는 모든 과거에 의해 만들어지는 식이다. 그것은 현재 진행 중인 어떤 순환 같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은 하나의 사물을 동시에 여러 방식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Peggy and Fred>와 같은 작품이 주는 불편함은 부분적으로, 관객을 관객이 편하기 위해서라면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관객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야기를 보고,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시간 프레임이란 무엇인지 보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거기엔 언제나 이상하고 신기한 볼거리가 있다. 상업적 가치 또한 있으며, 분명히 참여의 층위 또한 존재한다. 동시에 앞에 던져진 것들을 관람자가 수용해야한다는 압박의 층위 또한 존재한다. 이것은 난센스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일까? 당신은 그것이 무언지는 말할 수 없다. 이것은 결코 언어로 회복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Peggy and Fred>에 파운드 푸티지의 사용법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또 하나 있다. 어떤 의미에선, 난 모든 재료들을 파운드 푸티지인 것처럼 간주했다. 아이들의 행위는 잠재적으로 발견된 행위[파운드 행위]이다. 설령 그것이 시나리오 없이 찍혀졌고, 8년 동안 촬영했어도 말이다. <The So-Called Duck Factory>에선, 기록적 재료들과 내가 촬영한 재료들이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점점 구분이 희미해진다. 미래에 기록적 푸티지는 인용부호 없이 위치 지워지리라. 내가 지금 작업하고 있는 내러티브는 기록적 재료들을 다른 방식으로 취하고 있으며, 그 방식은 더 심화될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시작점을 이미 <The So-Called Duck Factory> 비디오에서, 특히 의식적으로 촬영된 것 같지 않고, 미학적 목적에 의해 촬영된 것 같은, 혹은 아예 왜 촬영했는지 모르기에―기록적 재료들을 볼 때 자주 있는 경우다― 그 성질이 촬영, 즉 촬영에 있어서의 정신의 부재와 같은 것에 반영된 신기한 자연 이미지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난 끈질기고, 형식적으로 선형적인 내러티브 기계, 일반적 담론 기계를 막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 잘 모를 어떤 것을 볼 때, 이제야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얘기했던 모든 것들과는 다른 기록적 재료들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의 신선함이기도 하며, 내 작업에 많이 기여해온 것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로딩 되어 있기에, 막 카메라를 쓰는 방법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했다. ―재미있게 놀면서도 어떤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내 으뜸원칙은 영화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 어떤 원칙도 있지 않다는 것이며, 수백만의 이유에서 수백만의 장소로부터 왔기에, 기록물들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술은 변화한다. 변화하는 것이다. 소위 예술가라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 그들의 비판적 관점으로 소통하기 위해 문어와 구어보다는 도구들을 사용하는 문화 비평가들이다. 그러나 내 자신은 그러한 범주에는 속하지 않는다. 절대 아니다. 난 그것을 [내 작품의] 한 측면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을 내가 이전에 말했는지 모르겠지만―난 진정 예술을 믿는다. 이 세상에 지금 문화적 생산자로서 비판적 관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지 아닌지는, 소위 미학이라고 부르는 칭호를 추구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누구를 지적하며 그것은 문제가 있고, 부르주아적이고 썩었다는 둥의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함께 가는 법이다. 끝까지 갈 것은 예술이다. 예술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뉴욕 (1991년 2월 19일)

(번역 : 이행준, 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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