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기/일기 영화: <월든>의 실천과 결과물 (2)

이 새로운 양식의 형식적 특질은 산업적 영화의 코드로 부터 일탈이나 아마추어적인 실수로 여겨질 수 있다. 60년대 초에 메카스가 유럽 뉴웨이브에 기반을 두어 점진적으로 개혁된 극영화에 대한 희망을 버리게 되면서 아마추어 영화제작은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것과 연관된 여러 종류의 위반은 내재된 윤리적 함의를 가진 완벽하게 절합된 어휘로 인정되었다: 일상의 모습들은 포괄적으로 서술되는 픽션 이상으로 중요해졌고, 분절적이고 불완전한 극소수의 “서정적” 이미지는 현실적이고 완벽하며 자기 표상적인 이미지 보다 선호되었다. 또한 스튜디오 퀄리티의 기자재 보다 기초적인 16미리 혹은 8미리 장비들이 가치있게 여겨지기 시작하였다. 미학을 민중의 정치적 갈망으로 연결시킨 메카스는 영화 속에서, 그리고 영화를 통해서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문화 혁명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4년의 경우를 고려해보자:

모든 쾌락들은 자기 파멸의 경계에 이를 정도로 도착화 되었다. (“사랑”으로부터 연원한) 단어 “아마추어”와 “집”은 불길한 것을 묘사하는데 이용된다.
그러나 언젠가는 매우 아름다운 영화 시가 8미리의 홈 무비 영상으로서 선보이게 될 것이다 풀밭 위의 아이들과 엄마 손 안의 아기들, 카메라 앞의 수줍음과 바보스러운 장난들이 있는 단순한 시.
- 요나스 메카스 <무비 저널Movie Journal> 131쪽
 카메라는 이제 사물과 사람들의 부분적인 모습들을 포착하고, 사물과 행동에 대한 일시적인 인상들을 자아낸다. 마치 액션 페인터처럼. 새롭게 영화(靈化)된 움직임과 빛 의 현실이 스크린 위에 창조된다.
- 요나스 메카스 <무비 저널Movie Journal> 191쪽

이러한 영화 이론은 60년대 중반까지의 보이스 컬럼에서 좀더 자세하게 다루어졌다. 1964년은 그 이론의 형성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인 해였고, 리빙 씨어터 극단이 케네스 브라운Kenneth Brown의 군함의 영창을 올리던 1965년 6월에 이르러 그것은 완성되었으며 메카스의 영화적 실천에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메카스는 공연을 촬영했다). 이 작업 자체는 일기 영화가 아니었으며 그것은 일기 영화가 아닌 그의 마지막 주요 작품이었다. 매거진 교체 이외에는 항상 연속 테이크로 촬영하는 그의 방식은 그로 하여금 공연에 대한 그의 인식의 계속적인 현재 속에서 공연에 반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새롭게 영화(靈化)된 움직임과 빛의 현실”의 기입은 핸드헬드 볼렉스에 대한 거장에 가까운 숙달력은 물론이거니와 한때 지하전영 바깥에서는 비현실적이고 비문법적이라고 생각되었던 노출, 프레이밍, 셔터 스피드의 표현적인 기능 효과들에 대한 선회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자원들은 브래키지Stan Brakhage에 의해 가장 포괄적이면서 일관성 있게 발전되었다. 그는 마치 그리피스D. W. Griffith가 헐리웃 서사를 혁신한 것처럼 지하전영을 위하여 과거의 혁신들을 합성하고 총체화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휘 속에서 메카스는 매우 세밀한 개인 언어idiolect를 확립했다. 그것의 지배적인 문채는 제유synecdoche이다. 그의 개인적인 삶이 일반적으로 중요성을 띈다는 전체적인 주제적 가정은 공간적으로 반복해서 제정되며, 그것은 마스터 쇼트를 통한 프레이밍보다는 클로즈업에 대한 집착과 일시적인 싱글프레이밍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사진의 짧은 파열들과 메카스가 일상의 사랑스러움을 기록한 방식이었던 싱글-프레이밍은 자연적인 사물이나 풍경의 색깔과 윤곽을 변화시키는 초점과 노출의 신속한 조절의 행위를 특징적으로 포함한다. 그것은 바로 태양과 함께 페인팅을 하는 행위에 다름없다. 끊임없이 항해하는 카메라는 한 직관에서 다른 직관으로 넘어가는-얼굴, 커피 한 잔, 선인장, 발, 자기 몸을 긁는 개, 다른 얼굴, 영화 카메라 등- 시각적인 통찰의 끊임없는 흐름을 창조한다. 이러한 풍경들을 묘사하는 단어들의 흐름에 어떤 분별성을 가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다음처럼 상세한 민감함과 시각적인 풍경에 대한 서로 다른 테이크들 주변을 오가는 미묘한 움직임이 표현되는 경우는 다르다:

태양은 지평선 위 맑은 공간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연못과 산허리 동쪽으로 사라졌다. 아직도 생생한 녹색 이파리 위의 이 갑작스런 불꽃은 주위를 감싸고 있는 어둠과 훌륭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각각의 관목과 나무들의 윤곽은 다소 솜털 같거나, 은 같거나, 초승달 같았다. 빛은 가장 솜털 같거나 새로 난 이파리의 밑쪽으로부터 반사되었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저널Journal>, 1860년 8월 28일

“오직 내가 사랑하는 것들만을, 세계의 아무 부분에 대한 나의 애정만을” 일기에 쓴다는 소로의 주장에 찬성하는 메카스는 <월든>에서의 보이스오버에서 그의 작업과정을 그가 보는 것들에 대한 축하연으로 설명한다.

싱글프레이밍이 영화가 유래된 풍경들과 영화가 유효하게 만드는 풍경들 사이에 만들어낸 급진적인 분리는 영화 일기 안의 다큐멘터리 혹은 재현적 양식의 제약을 드러낸다. 만약 월든에서의 또 다른 보이스오버가 주장하듯이 “영화가 프레임들 사이에 놓여 있다”면, 프레임들 사이의 갭이 좀 더 과장스럽게 넓혀지면 질수록 그것들이 생산하는 축하적인 영화의 힘은 더욱 증가한다. 일기에 기록된 인식은 결국 눈의 광학에 진실된 것이라기보다 매체-특정적이며 기술적으로-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매개된 것이다. 영화가 영화 장비와 존재론적으로 관계없는 현실들을 단순히 기록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마야 데렌Maya Deren의 믿음부터 베르토프Dziga Vertov의 키노-아이까지 기반 한 신형식주의의 원칙들 위에서, 예술은 이화(異化)의 과정으로, 시각적 감각의 기록이 아닌 그것의 변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바라보기의 행위가 카메라의 중재로부터 튀어나오는 게 가장 논리적이다 싶은 매우 결정적인 지점들에서 후자의 경우가 고집스럽게 강조된다. 영화 일기는 당신이 어떤 영화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는 끊임없이 렌즈를 쳐다보면서 촬영을 해왔고 계속하고 있는 척을 하라고 추천한다. 마지막 목표는 결국 카메라의 초월이 아닌 인간 주체가 그 기구에 대해 동질화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드 엠쉴러가 카메라 그 자신이 되기를 원한다는 이유로 칭찬받는 이유인 것이다. 눈조차 필연적인 참여자는 아니다. 메카스 자신도 자주 허리 높이에서 촬영을 했거나 뷰파인더를 보지 않고 촬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획은 베르토프의 작품처럼 그것이 산업화의 일반 프로그램의 일부였던 구성주의적 미학에서는 일관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메카스의 철학을 구체화했던 유기주의와는 상반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눈먼 순간들과 이론적으로는 절합 혹은 표현 불가능한, 그러나 실천에 있어서는 완벽하게 숨겨질 수 없는 모순들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필연적으로 그것들은 영화 일기를 일기 영화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모순들이 작동하는 여러 개의 맥락은 메카스의 삶과 생각의 구조 속에서 리투아니아의 어린 시절의 역할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뒤에서 곧 보게 되듯, 일기 영화들의 요약 서사는 리투아니아를 되찾으려는 시도이다. 다시 말해 요소요소들의 동일 구조와 대체물이 메카스의 신화의 거대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임무와도 같다. 그 신화는 어머니의 회복이라는 정신분석학적 요소, 유기적 마을 커뮤니티라는 사회적 요소, 농촌의 부활이라는 환경적 요소, 그리고 이들에게 적합한 문화적 실천의 회복이라는 철학-미학적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한 실천의 은유는 궁극적으로는 논리적, 역사적으로 산업 문화와의 상보성 속에서 구성된 본격 모더니즘 아방가르드의 은유가 될 수 없다. 대신에 그것은 다다의 순간처럼 반-모더니즘, 반-미학적 아방가르드가 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산업화 이전의 귀환으로 제안된 것인 동시에 예술에 대한 구체화된 칸트적-사뮤엘 테일러Samuel Taylor Coleridge식의 실체화 행위인 것이다. 예술을 초월한다는 것, 완벽하게 비-비평적, 반-예술, 반-영화적이라는 것도 일찍이는 이미 1960년에 만들어진 공식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에 가장 적절한 메타포는 “민속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8미리 홈 무비 영상이 마치 민중들에 의해 창조된 노래들이나 서정시처럼 아름다운 민속 예술로써 수집되고 감상될 날이 머지않았다. 몇 년이 더 걸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브롱크스 출신의 여성이 아리조나 사막을 지날 때 촬영한 석양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여행 동안 촬영된 영상이나 갑작스런 행복감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어색한 영상, 브룩클린 대교 영상, 봄의 벚꽃 영상, 코니 아일랜드 영상, 오차드 거리 영상의 아름다움도 이해한다. 시간이 그것들 위에 시(詩)라는 이름의 베일을 드리운다.

- 요나스 메카스 <무비 저널Movie Journal>, 101쪽

여기서 시인의 은유는 여과되지 않고 남아있으며 부르주아 미학은 여전히 민속 예술로써의 홈 무비가 수집될 것이라는 강조의 자취를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용은 영화 산업과 그것의 보완인 아방가르드를 모두 거부하고, 그 둘 모두를 대체하는 동시에 그러한 이분법이 생기기 이전의 시간을 되찾는 실천을 신봉한다. 이것이 바로 영화 일기의 본질적인 아포리아인 것이다. 메카스는 전-산업적, 유기적인 사회와 가치들의 신화를 축하하기 위하여 현대 산업 생산으로 완벽하게 융합되었던 기계적 재생산의 기구를 사용하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모더니즘의 한 역사는 물론 다른 매체들의 각기 다른 재현적 능력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산업 혁명 이후의 100여년 동안 영국 낭만주의와 후기낭만주의 시들은 산업화 혹은 도시화를 주제로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반면에, 영화는 이러한 작업에 (단순히 역사적인 맥락 뿐만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재능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현대적 삶의 회화 속에 하나의 유기주의와 육체적 민감함을 다른 것의 기제로 합치려는 시도를 하면서 메카스는 자신이 인상주의 화가들의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시 여가, 대중문화의 새로운 형태들, 보헤미안적 삶, 패션 등을 그리려는 인상주의적 욕망은 도시 공원으로의 피크닉이 반복적으로 존재하는 메카스의 영화들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맨하탄에서 리투아니아를 발견하려는 그의 시도는 현대적 풍경을 그리려는 모네의 시도와는 평행선을 긋는다. 모네는 1870년대 초반 잠시 동안 잠시 아르장퇴유의 급속도록 산업화되며 확장되는 파리 교외 지역에 살면서 근대화의 흔적들을 포함한 풍경들을 그려냈다. 그림들은 일반적으로 아르장퇴유의 모습과 파리 시민들을 위한 기숙사로 바뀌어가고 있던 기찻길을 담아냈다. 그의 전략은 “재-자연화된” 형식으로 눈에 덮힌 도시 풍경을 재현하던가, 혹은 시골 장면 안에 기차를 포함하는 식이었다. 눈에 덮힌 기차 (1875)는 이 두 전략을 통합한다. 곧 사회적 긴장관계는 그러한 동화를 용인하기에는 너무도 심각해졌고, 모네는 덜 개발된 환경들을 찾아, 즉 그의 정원과 백합 연못을 찾아 떠났다. 메카스 역시 동일한 해결책을 찾았다. 그는 사막에 서 있다의 초반에서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의 쇼트처럼 특이한 예를 제외하면 (그것은 뤼미에르에 대한 언급으로 작품을 현실에서 벗어나 영화사로 향하게 만든다) 현대 산업은 일반적으로 그의 작업 범위 바깥에 존재한다. 리투아니아로의 여행의 기억들에서 그는 소비에트주의 아래에서의 기술적 진부에 대한 무관심을 천명했고, 그의 유년시절 속의 리투아니아만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했다. 그는 또한 마야코프스키Vladimir Mayakovsky와 샌드버그가 산업에 가졌던 신념을 이해할 수 없다고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의 일상이 끊임없이 그 자신을 도시의 기계적 재구성의 문제로 몰고감에 따라 모더니티는 탁월한 방식으로 기차 안에 존재하거나 눈에 덮히게 되는 것이다. <월든>은 네 개의 주요 기차 여행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네 개의 지점으로부터 자연적인 요소들이 눈을 번쩍이게 하는 아름다움의 형태로 출현한다. 반면에 사운드트랙에 만연한 뉴욕 지하철의 소음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봄바람 같은 소리가 난다. 뉴욕은 목가적 훌륭함의 장면이 아닐 경우에는 대부분 눈에 덮여 있다. 메카스는 소로와 마찬가지로 눈 폭풍의 자체 검열관이다.

메카스의 농촌에서의 유년생활과 뉴욕에서의 보헤미안적 삶의 매혹이 그를 구성하는 두 개의 원천이라면, 그가 근대성을 자신의 일기 속에 완벽하게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은 리투아니아가  회복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궁극적이면서도 아이러니컬하게 의미화 한다. 그것이 성취될 수 있으려면 개인의 현재 인식만을 포함하는 영화 일기의 범위가 보다 더 넓은 산만함의 양식-사회적 확장도 가능하며 과거를 다룰 수도 있는, 다시 말해 일기 영화-으로 확장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이는 대상은 일상이 아니라 영화의 부분들이다. 주관성의 기입은 육체적으로 적응된 싱글 프레이밍과 인-카메라 편집에서의 홍채를 조작하는 식이 아닌, 편집실에서 제목과 사운드트랙을 자르고 추가하는 형태를 취했다. 영화 일기가 사회적 관계들을 삭제한 자리에서 새로운 실천은 작게나마 그것이 재현하는 공동체와 연속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Ⅱ 영화 일기

The past cannot be presented.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콘코드과 매리맥 강에서의 일주일A Week on the Concord and Merrimack Rivers>(1849)

메카스는 장편 프로젝트들을 실행하는 대신 영화 일기의 미학과 윤리적 우선성을 실현하였고, 이는 메카스의 성숙기의 영화적 실천이 가능할 수 있었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는 그 작업들을 편집하여 자주적인 예술 작업들-즉 영화들-로써 공적 영화 기관들-덜 형식적이며 상대적으로 덜 유리된 아방가르드 기관들-에 소개하기로 했을 때 반대의 운동을 초래하였다. 그는 개인적인 인식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공적인 사건으로써의 영화의 역사를 거부했고, 또한 극단적인 주관성과 전례없는 형식적 복잡함이 가득한 자전적인 영화들로 대중과 맞닥뜨렸다. 이는 관객과 비평가들 모두에게 극단적이고 전례 없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상업 영화에 저항하는 아방가르드의 위치를 다시 제정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실천이 결과물로 선회하게 된 개인적인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진정으로 저항적인 영화가 취할 수 있는 형식이 던지는 정치적인 질문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사막 위에 서 있다>에서 보이스오버로 메카스가 이 영화가 “정치적인 영화”라고 이야기한 사실은 그의 오래전의 꿈이었던 반전 영화들과 연결되는 동시에 정치에 대한 굉장히 다른 개념을 드러내기도 한다.

메카스가 영화 인공물을 생산하기로 한 결정은 현재성과 인식의 과정, 매체의 반-인공물적 이용, 그리고 개인의 계발 방식으로써의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일기의 헌신에 대한 타협으로 보일 수도 있다. 비슷한 프로젝트를 가진 다른 영화인들의 정반대의 결정들은 계몽적이다: 잭 스미스Jack Smith가 자신의 작품이 대중에게 공개되기를 거절한 것은 헐리우드에 반한 행위라기보다는 아방가르드의 제도화에 대한 반기이자 그 과정에 있어서의 메카스의 역할에 대한 행동이었다. 반면에 메카스는 자신의 일기의 형식적 형식들과 이상주의와 고집을 리메이크하고 대중에게 확대하는 과정에 있어서 영화가 새로운 기능들을 행할 수 있게 만들었고 또한 매체가 가진 사회적 가능성들을 변화시켰다. 이러한 이중의 몸짓의 모순들이 월든에 존재하며 또한 그것을 결정한다. 그들은 또다시 우리를 소로의 세계로 보내는데, 이번 경우에는 각 매체의 물적 조건에 의해 부분적으로 결정되었으며 메카스가 미국에 새로운 집을 찾은 특정한 방식에 의해 부분적으로 결정된 유사성과 비유사성의 패턴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미국 초월주의자들이 낳은 가장 본질적이고 진정성어린 문학 작품들은 바로 그들의 일기였다는 형식주의적 주장은 소로와 에머슨의 경우뿐만 아니라 브론슨 앨콧Amos Bronson Alcott, 마가렛 퓰러Margaret Fuller, 그리고 찰스 킹 뉴콤브에게도 제기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사회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일기 쓰기의 콘코드 “시골집 산업”이 가진 “연대기적 시간에 대한 정교하게 비체계적, 비균질적, 지체적 관계”는 “미국적 템포에 대한 부분적 거부”이자 “미국 기계적 상업적 자본주의에 대한 부분적 거부”로써 이해되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고 관습적으로 인정된 문학 장르에 대한 거부를 통해 초월주의자 일기 쓰기 행위는 문학 생산 및 소비의 지배적인 양식을 거부하였다. 일기를 함께 보고 교환하는 습관은 사적 공적 담론 사이의 구분을 뛰어넘으면서 글쓰기의 상업화를 실질적으로 견제하였을 뿐 아니라 일반 부르주아 사회의 상업 기반의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저항을 함축하였다. 그것은 개인적 양심의 사적 영역과 상업적으로 출판된 책들의 공적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예술과 상업 바깥에 준-공적 문학적 장을 유지하였다. 초월주의의 이상주의적 사회 프로젝트의 기호와 이러한 문학적 장에서의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상호의존성은 그것의 충족의 방식이기도 했다. 동일한 사안이 일기와 문학적 장에서 일기 영화와 영화로 근대화되고 번역된 메카스의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소로의 월든은 대중들에게 홍보되었던 완성된 미학적 대상이었으나 그의 일생 동안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또한 이상주의적인 콘코드적 실천에도 등을 돌렸었다. 한 세기 후에 메카스는 그러한 실천을 재발명하여 과거의 장르들 바깥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만약 소로의 작품과 동등한 상업 작품을 만들었다면, 다시 말해 그의 일기의 준거 틀에서 벗어나 홍보가 가능한-마치 제롬 힐Jerome Hill<영화 자화상Film Portrait>처럼 장편영화 길이로 일기를 압축한다거나 그의 삶을 극화한- 작품이었다면, 메카스의 <월든>은 소로의 작품을 닮았을 것이다. 이제는 대여점에서 구할 수 있고 구입도 가능하지만 여러 면에서 그것은 소로의 월든보다는 소로의 일기와 더 많은 유사성을 공유한다. 영화 속에 출현한 친구들의 공동체 안에서만 영화가 보여질 수 있었던 것은 메카스의 매체 자체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다.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은 소로에게 있어서 글쓰기와 삶이 가진 평행적 관계를 지적하면서 <월든>에서 묘사된 행동들이 은유적으로 글쓰기 행위를 재연한다고 주장하였다. 

각각의 직업-작가가 행동 혹은 노동의 “장(場)”이라고 의미하는 것-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집을 짓는 것과 괭이질을 하는 것과 쓰기와 읽기 (걷기와 음식 준비, 방문자 접대와 못 박기, 얼음 조사하기를 추가할 수도 있다) 등은 서로에 대한 알레고리이자 측량인 것이다. 진짜 유일한 건물은 계발의 행위이다. 모든, 그리고 오직 계발의 행위들만이 인간의 거주에 적당하며, 그것 없이는 삶을 살지 못한다. 만약에 당신의 행동이 그것의 장에서 그러한 측량을 감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 장이 당신의 천직이 아니라는 신호이다. 작가의 글쓰기가 삶의 대체물이 아니라 삶을 고발하는 자기만의 방식인 것이다.
- 요나스 메카스 <무비 저널Movie Journal>, 60쪽

월든이 소로의 삶을 지탱한 집이었다는 주장은 메카스의 작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 자신의 홈 무비로써의 <월든>은 그의 영화이자 그의 집이었고, “삶의 대체물이 아닌 그만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메카스에게 있어서 집이라는 특질적인 문제는 옛날의 리투아니아와 새로운 미국에서의 집 사이의 분열에 의해 형성된 이중의 원자가이며, 동시에 과거를 현재의 현실로 협상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를 재-현하는데 있어서 그것의 영화 버전을 매우 복잡하게 만든다. 그의 작품들은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홈 무비들이고, 집의 부재라는 사실로부터 시작된 영화들인 것이다. 소로는 자서전에 대해서 “먼 땅에서 친척들에게 보내는 내용”이라고 일컬은 적이 있다. 그리고 메카스의 <월든>이 망명 중에 보낸 편지라고 할 수 있다. 망명지만이 그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집인 시기를 아우르며, 또 그 집이 다른 집에 의해 대체되어 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그것은 원래의 집의 획득불가능성과 맞닥뜨린다. 상실에 대한 끊임없는 대화, 보답에 대한 일시성과 보완성은 영화의 형식적 특질 속에 기입되어 있으며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되어진다.

소로의 예술이 글쓰기이었던 까닭에 그는 원래의 일기들과 그에 대한 회고적인 디테일들을 한데 합쳐 단수적이고 연속적인 텍스트로 통합하여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 책에서 개정된 부분들의 자취들은 조판에 의해 봉인되고, 형식적 비연속성은 숲 속의 거주와 문명에의 귀환의 서사의 목적론 속으로 포함된다. 그러나 메카스에게 있어서 과거의 부분들은 내적으로 변형될 수 없고, 새로운 개정을 통해 연속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의 조각들로 존재한다. 영화 일기가 즉각적인 인식의 현재형에 의해 제약된다면, 일기 영화는 그 자신의 현재를 잃어버린 시간, 존재론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과거의 조립된 부분들을 이용하여 맞선다. 자취들의 검토와 그에 대한 주석은 모든 자전적 행위가 그러하듯이 “자신의 과거의 발굴보다는 작가의 현 상황의 폭로가 되어야만 한다.” 고집스럽게 그 자신의 시간 안에서 접근 불가능한 영화들의 보존된 조각들은 동화되어 있지 않은 채 산만하게 남아있다. 편집은 오직 그것들의 현재적 인식을 명확하게 할 수 있으며 그때와 지금 사이의 메울 수 없는 틈을 입력하게 될 내용만을 추가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 분리된 인식의 겹들의 중첩은 혼합된 재현적 양식들이 뒤죽박죽 섞인 조합을 생산한다. 자서전에 팽배한 문제는 발화의 주체와 말을 하고 있는 주체 사이의 관계의 문제로서, 재현되는 메카스에 대항하여 재현하고 있는 메카스의 문제가 있듯이 시간적으로 나뉜 버전들 간의 맞섬으로 이중화된다. 복수의 이질화는 각기 다른 텍스트 체계에서 구성된 회복불가능한 주관성들의 문답적 상호작용 안에 침전된다. 일기, 노트, 스케치로 구성된 <월든>은 편집되지 않은 원래의 영상과 다른 영화들로 편집되고 상영된 영상들, 그리고 중간 단계의 영상들을 포함한다. 영화 일기의 순수하게 시각적인 실천이 단일한 감각과 단일한 텍스트 체계를 특권화 했었던 자리에서, 일기 영화는 원래의 이미지를 사운드 및 분리된 영상에 종속시킨다. 영화를 말들과 조직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서의 대본 및 일치된 대화를 삼가면서도 <월든>은 항상 글쓰기에 의해 삶을 획득하고 이동하게 된다. 모델로써의 문학 장르의 전유를 통해, 촬영된 제목들과 기록된 목소리들의 포함을 통해, 소로 책의 페이지의 사진들에 의해, 그리고 메카스 자신의 보이스오버 해설에 의해. (궁극적으로 그것은 구두로 전사된 내용을 출판한 형태에서는 순수한 단어들로 나타날 것이다) 여기에 옛날의 생방송-기록된 대화들과 음악, 새 음악, 다른 소리들이 또한 추가될 것이다. 최종본은 결국 다양한 내용이 한데 뒤죽박죽 섞이고, 일기의 단일한 도상성은 여기저기로 흩뿌려진다. 최종본이 모든 다른 담론들을 구획 짓더라도 권위적인 해설은 그것들을 모두 포함하거나 자신의 통제 아래에 있는 위계 안으로 집어넣을 수 없다.

촬영의 시간과 편집의 시간이라는 두 종류의 주관성들의 분리는 현재의 의식을 무서울 정도의 자주성과 함께 대면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과거의 픽션들을 창조하도록 만든다. 결과적으로 영화에서 조립된 서사적 시퀀스는 메카스의 삶의 연대기를 매우 크게 재구조화한다. 형식주의적인 용어로 “이야기”(영화 일기에 침전되어 있는 메카스의 삶의 역사적 시퀀스)는 “플롯”(영화 속에서 구성되는 사건들의 시퀀스)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새로 쓰기의 조건들은 시간에 종속되어 있으며, 메카스가 자신의 일기 영화들이 포용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감각의 진화 역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이 개봉된 영화들로부터 배제된 일기 영상은 아닐지라도, '그림 1'은 시간적 복잡성이 지시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잔존하는 존재들이 사유되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시간이 다양함에 따라, 사진가와 편집자 사이에 가능한 대화의 내용도 변화한다. 그러한 거리가 크면 클수록, 상실감과 시간의 획득불가능성에 대한 심리는 더 극단적으로 변할 것이다. 편집이 촬영을 좀 더 가까이 따라다니면서 느껴지는 시간의 파괴력은 비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다. 편집 당시에 기록된 <월든>의 이미지들은 30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편집된 적이 없었던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Lost Lost Lost>(1976) 에서의 1940년대 후반의 영상과는 전혀 다른 질문들을 제기한다. 이러한 변주들은 전체로서의 시퀀스의 서사 드라마를 보충하고, 그 안에서 각각의 개개 영화들의 드라마를 보충한다.

그림 1. 월든의 “첫 초고 판” 프로그램 노트의 시작

그림 1. 월든의 “첫 초고 판” 프로그램 노트의 시작

일기에는 작성 당시에는 가시적이지 않았던 패턴들이 돌이켜보면 드러나 있다고 작가들은 말한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글을 다시 읽을 때 “정신없게 놓여진 사물들을 찾아다녔고, 그 당시에는 절대 보지 못했었던 의미를 찾았다.” 메카스 역사 유사한 발견들을 늦은 밤이나 일기장을 들춰볼 때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추가된 보이스오버와 제목들에서 그는 보존된 이미지들에 대해 해설하며 그것들로부터 유년 공동체의 상실로 인한 트라우마의 신화와 예술과 예술가 공동체를 통한 회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낭만주의에 만연하고 워즈워드의 서곡Prelude에서 가장 완벽하게 서술된 세속화되고 내면화된 기독교의 신화이다. 메카스는 그 신화를 처음으로 완벽하게 <월든>에서 분절해냈고, 그것이 확립한 구조에 기반한 이후의 변주 작업들에서 그 신화는 각기 다른 시간적 범위로 이동시키거나 특정 단계에 집중한다. <로스트, 로스트, 로스트>는 리투아니아와 뉴욕의 초기 삶이라는 이중의 상실을 대변한다. 그러나 보이스오버의 주저하는 음색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또한 -필름 컬쳐의 발간이나 켄 제이콥스, 바바라 루빈 같은 이들이 대표했던 영화계 커뮤니티와 같은- 회복의 초기 단계를 스케치한다. 리투아니아로의 여행의 기억에서 그는 또다시 50년대 초의 영상들을 맞닥뜨리고 그것을 리투아니아로 돌아갔을 때 수집된 영상들에 중첩시킨다. 거기서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로 복구되지만, 그의 유년 시절이나 전쟁 이전의 농촌 사회는 다시 되찾을 수 없고 거기 머무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전후 시기에 뉴욕에서의 삶의 상실을 수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낙원에서는 그의 새 아내와 딸은 처음에는 상실에 대한 대가의 보상으로 나타나는 듯 보이고, 실제로 그의 딸은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대리경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상실감을 딸에게로 치환한다. 그는 영화에 포착된 “낙원의 부분들”이 -이번에는 가족들과 함께 방문하는- 리투아니아 집처럼 불명확하고 회복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는 사막에 서있다>에서는 비탄의 보이스오버가 투하되는데,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인 사회적 삶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기록은 여전히 부유하고 유명한 자들의 삶의 습관 속의 그의 순간들에 대한 거친 기억들에 대항하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화들 속에서 상실은 단순히 마스터 서사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의 조건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그것은 영화 일기와 일기 영화 간의 절대적인 차이를 입력한다. 사진의 인식론적 제약을 반영하는 전자는 오직 지금 있는 것만을 입력할 수 있지만, 반면 과거가 되어버린 것들의 조각들의 사유는 그것들 안에서 고정되어버린 상실을 직면한다. 여기서 그것들은 불가능한 영상, 바로 전체 프로젝트의 부재하는 중심이기도 한 리투아니아에서의 그의 유년 시절의 영상의 보조적인 형태들이다. 이것은 절대 촬영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계적 재생산의 도입이 전-근대성의 조건을 파괴했었을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불가해한 것이다. 전체적인 실천은 부재-획득 불가능한 은총을 추구하게 되면서 동기화된 일상적인 자기점검의 청교도적 일기의 소생- 위에 구성되었고 그것에 따라 결정된다. 메카스는 과거로부터의 영상에 대한 현재의 의식의 침임 없이는 진행 중인 일기 영상을 즉각적으로 일기 영화로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근원적 상실에 대한 보답이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재난이 일어나야만 한다. 따라서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낙원에서 시간의 행복감을 우나에게로 투사하는 행위가 일어나는 것이다.


<월든>은 이러한 신화의 언급을 소로에 대한 이중의 주장으로 시작한다. 메카스는 소로의 유토피아의 사항들을 어떠한 서브텍스트 하에서 재조직한다. 후기산업시대의 미국을 살았던 소로에게 있어서 Walden 연못은 고독감에게 공동체에 대한 반대로써 정의된 자연을 선사한다. 그러나 전근대적인 리투아니아 마을에서 삶을 상기하는 메카스는 그 두 가지를 친구들, 자연, 예술이라는 워즈워드적인 구원적 삼위일체로 정체화한다. 그 자신의 <월든>에서 공동체는 자연 속에서 발견된다. 맨하탄을 농촌적 누락의 광학을 통해 새롭게 그려보던 도시 바깥에 사는 예술가들을 방문하던 간에 말이다. 이것에 반대하는 다른 움직임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메카스 자신도 아방가르드 영화만들기의 과정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였고 그러면서 그는 그것으로부터의 차이를 확언하였고 다르게 건설된 실천-좀 더 소로의 그것과 같은 개인주의-에 헌신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메카스의 <월든>의 텍스트적 풍부함은 격렬하게 사람들의 주의를 그것의 현재로 끌어들이고 이러한 플롯의 모양을 비-동기화된 일상의 난잡함이라는 수면 아래로 잠기게 하기 때문에, 메카스 자신의 전사의 디테일 속의 첫 번째 악장, 그리고 좀 더 많은 것들이 찾아져야만 한다.

오프닝 부분은 영화가 발전시킬 주제적 핵심을 확립한다. 메카스가 오랫동안 살았고 “삶의 모든 골수”를 뱉어냈던 맨하탄은 월든으로 발견되어져 왔다. 그에게 있어서 그곳은 예술, 친구들, 그리고 자연이 일치하는 곳이다. 영화는 무엇이 그것의 불가결한 반영성으로, 맥락과 정당화를 선사하는 우정이나 독립영화의 다양한 면들의 기록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지 공표한다. 일상의 사건들은 독립영화 제도의 구성이고, 그의 친구들은 행위자들이며, 주변을 감싸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소로처럼 그는 맨하탄에 갇힌 것일 수도 있지만 꽃과 나무, 석양 등 자연의 다양한 형태들에 의해 모든 곳이 생동감을 갖게 된다. 눈 속에서 메카스는 그로 하여금 뉴욕을 리투아니아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요소를 발견하고, 금발머리에 맨발로 공원에서 풀을 뽑는 비비 한센은 리투아니아의 농민 소녀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그림 2. <월든> 첫 장면. 메카스가 직접 작성한 프로그램 노트에서.

그림 2. <월든> 첫 장면. 메카스가 직접 작성한 프로그램 노트에서.

이러한 요약적 입당송 이후에 영화는 주요 발전을 시작하게 된다. 1964년에서 1968년 사이의 사건들은 소로적인 모델을 따라 세 단계의 1년-각각의 단계는 두 개의 릴을 점유한다-으로 굉장히 거칠게 응축된다.봄을 지나 겨울, 그리고 또 다른 가을. 오프닝 시퀀스 이후의 첫번째 릴 내용은 세 개의 섹션 각각에 구두점을 찍는 결혼식들 중 첫번째가 등장하며 홈 무비 만들기와 삶을 동일시하는 보이스오버의 등장 지점을 마련한다. 이후로는 제롬 힐, P. 아담스 시트니, 스톤 가계, 팀 리어리, 그레고리 마르코풀러스, 알렌 긴스버그, 하헤 크리슈나 히피스와 같은 다른 영화인들, 예술가들, 지성인들을 방문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두번째 부분은 뉴욕의 영화인들이 좀 더 많이 등장하는 한겨울의 장면들로 시작하며, 7년 전에 있었던 평화 시위로의 플래시백, 필름 컬쳐 및 작가 조합 비지니스, 시골에서의 겨울 하이킹, 거리 장면과 크리스마스 파티, 브래키지 가족이 살고 있는 눈으로 뒤덮힌 산속 집으로의 기차 여행 장면들이 등장한다.

브래키지 가족과 그들의 홈 무비는 영화의 중심이고, 또한 영화의 윤리적 체계의 중심이기도 하다. 집 안으로 안내되고 그들의 참여적, 가정적인 영화만들기에 동참하면서 메카스는 이상적인 영화로 융화된다. 그러나 그러한 귀가 그 자신의 삶의 신화에 존재하는 리투아니아의 위치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에 문제적이기도 하다. 다음 섹션에서 민속춤을 추는 리투아니아 이민자들의 이미지들 위로 메카스는 그가 가진 다양한 병적 공포들을 털어놓고, 더 이상 꿈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묻는다: “내가 밖으로부터 가져왔었던 모든 것을 잃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소리는 잊혀지지 않는 리투아니아 민요로 커트된다. 유년 시절의 리투아니아의 자취들을 그것의 재창조의 이상적인 형태와 중첩시키는 행위가 바로 이 영화의 위기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일상, 새로운 세계에서의 삶이자 독립영화인 커뮤니티의 삶의 완벽함이 주는 보상을 용인하는 행위로 해결된다. 그리고 세 번째 섹션에서 그는 뉴욕으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장소로 돌아가 -우리가 윤곽을 그린 용어들을 통해- 그것을 <월든>으로써 인식하게 된다. 영화에서 이 집을 발견하면서 그는 국가의 기원의 개인적 재연으로 어떤 미국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한 것으로, 그는 또한 자신의 고립을 보존하고 이 커뮤니티와 그들이 실천하기 시작한 종류의 영화 만들기로의 완전한 동화를 결국 거부하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 악장에서 메카스는 브래키지 가족의 집으로부터 돌아와 자신의 실천을 반-헐리우드적이라기 보다는 반-아방가르드로 정의된 개인적 인식으로 명확히 한다. 아방가르드는 이제 악화되고, 상업화되었으며, 선정적으로 다루어진다. 반-주제는-아돌퍼스가 지하영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독일 TV 스태프를 위해 할렐루야 언덕 장면을 촬영할 때와 같은-의미 없이 긴 시퀀스 속에서 극화되었다. 그것은 또한 메카스가 비극, 드라마, 긴장감이 전혀 없는 자신의 이미지들이 “나 자신과 몇몇의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미지일 뿐이며 볼 필요는 없지만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 보이스오버에서 다소 산만하게 분절된다. 유기적인 예술작품에 대한 거부와 그 자신과 “몇몇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명확하게 아마추어적인 작품의 선호는 마지막 릴에서 절정을 이룬다. 여기서 메카스는 지하영화의 클리셰가 된 것들을 날카롭게 조롱하고 경멸하면서 일상의 촬영으로 돌아간다. 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촬영하겠다고 단언하며, 어느 화창한 가을날 센트럴 파크에서의 여자 친구의 모습으로 영화를 끝맺는다.

잃어버린 리투아니아에 대한 보상으로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발견하고 지하영화 속에서,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면서 자신의 영화 일기의 일부에 대한 강박적인 수정을 제안하면서, 이러한 서사는 과거의 파편과 그것에 대한 현재의 성찰-구성의 과정에 대한 정보를 주는- 사이의 상호 작용을  알레고리적으로 재규정한다. 삶과 영화를 통합하려는 시도에서의 성공과 실패의 동일한 이야기는 전시와 소비의 과정들을 통해 서술되고, 동시에 시네마-영화는 복수성과 텍스트의 위반을 재생산하는 필름-영화에 의해 함축되고 창조된다. 승인된 일반적인 형식에 대한 거부-사적인 것을 단순히 사적인 상태로 공적인 영역으로 분리한 채 유지하는 것에 대한 거부-는 수동적으로 영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거부를 거의 필연적으로 만든다. 결국 홈 무비의 격리된 가정성도,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경계적 영화들이나 영화 산업의 대중 영화들도 그것들이 수반하는 합리화 과정을 거부하는 영화적 실천을 위한 집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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