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학光學적 숙고熟考 Reflexions optiques

빠트릭 보카노프스키

<화장하는 여자Une Femme qui se poudre>, <늦은 아침 식사Le Dejeuner du matin>, <천사L'Ange>에서, 보카노프스키는 표준적 렌즈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이미지들을 창조하기 위해서, 그는 다른 광학기기, 즉 피사체의 “사실주의적” 재생을 목표로 하지 않는 “주관적” 광학기기의 창조를 열망했다.

엘리 포르Elie Faure, 엡스뗑Epstein, 혹은 영화 초창기의 어떤 작가들의 텍스트를 통해, 우리는 “종합 예술Art Total”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극적이고 환영적인 일종의 망상으로 인도된다. 그들에게는 영화란 모든 것을 취하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춤, 희곡, 회화의 모든 역량을 가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생긴 일은 영화의 대다수의 계획은 중도에서 멈췄다는 것이다. 사진이 나왔을 때, 당시 작가는 모두 화가였다! 사진은 그들의 데생에 대한 욕망에 상응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진은 처음에는 졸렬하고 테크닉적으로 어설펐지만 점차 완성되어갔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 그들은 매우 엄밀한 미술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회화와의 애증이다. 그들의 실재에 대한 비전은, 그들의 미술에 대한 취향과 미술적artistique 실천에 의해서 영향 받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보다 몇 세기나 더 오랜 회화의 역사적 성취는 각 사진이 욕망과 취향에 따라 이미지의 무한한 측면과 스타일을 보존 했다는 것인데 예를 들면 관점, 구성, 묘사, 윤곽, 모델, 공간이라는 구성과 관점의 다양한 모델들을 제공했다는 점과 결국 이를 통해 가시적 심리학의 물질화되고 완성된 경험의 다양한 모델들을 제공했다는 데에 있다.
그러한 시대엔, 오늘날과 달리 기술자와 작업자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사진가는 화학자인 동시에 광학자였으며, 카메라를 제작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그러한 장치들, 즉 영화 장치가 예술의 모든 역량을 포괄하게 되리라는 것은 그들에게 자명한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시대의 예술 그리고 개개인은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차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열정은 사라졌고 그 기획은 폐기되었다. 


현대의 영화와 회화

현대 영화인에게 회화와 영화는 혼동될 수 없는 각기 다른 두 세계이다. 이는 그들의 담론과 그들의 글에서 분명히 나타난다(예를 들어 트뤼포). 너무 “회화적인” 영화는 의혹을 일으킨다. “좋은” 영화라면 회화의 미적 기준들과는 단절되어야 한다. 이것이 공식적인 관점이다. 그렇지만 작가들은 회화적인 기준을 끊임없이 지시하면서 그 반대를 수행했는데(트뤼포도 똑같이!), 대부분의 경우 촬영감독의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라 뚜르, 베르메르 혹은 르느와르 등을 참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하튼, 그러한 회화에 대한 끊임없는 참조는 단지 피상적인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이는 근본 요점은 아니다. 우리는 통상적인 렌즈optiques conventionnelles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선택은 전 세계적으로 3~4가지 밖에 되지 않는, 그래봤자 거의 똑같은 필름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솔직히, 사람들이 스타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베르메르, 라 뚜르, 르느와르, 기타 등등” 식의 조명(그리고 의상)을 통해서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의 표면에 머무르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제 사진과 영화가 서로에게 스타일의 자유와 그래픽적인 표현을 부여하는 애초의 상황과는 반대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테크닉의 보편성

“이미지 스타일”의 빈곤화의 명백한 이유 중 하나는 사진과 영화의 보편성에 있다. 더 빠르고, 더 단순하게, 더 획일적인 수단을 추구했었다. 소형화 덕택에 카메라를 만인의 손에 쥐어줄 수 있었던 이스트만Eastman의 프로젝트는 참으로 대단한 발명이었다. 사람들은 보편적 도구를 창조했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한 쪽에서 얻은 것(촬영 도구의 단순화)을 다른 쪽에선 잃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지 형태의 탐구(개별성, 이미지에 내재적이기 까지 한 스타일)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일본, 나이지리아, 유럽 혹은 중미의 감독이 동일한 이미지를 촬영하는 일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일까? 분명히 그들의 스타일, 조명법, 시나리오는 모두 다른데, 왜 그들의 그래픽은 “철저한” 자신들만의 문화가 없는 것일까? ― 혹은 왜, 다른 문화를 동경한다면 그것을 동화시키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아프리카 조각품과 일본 판화를 혼동하지 않는다! 영화적 이미지의 이러한 전 세계적인 단일성은, 어쩌면 예술적 개별성의 소멸을 초대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구체적으로 작가는 감광지의 감도를 높이고 렌즈를 조작하고 건조하는 것을 단념했다. 그런 일이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과거로의 회귀여서는 안된다. 픽토리알Pictorial회사는 최근에 감광지를 다시 쓰는 사진들을 전시한 바 있다. 뛰어난 자료들이 있었지만, 1890년도 것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것은 새로운 “방식”은 아니었던 것이다. 

렌즈의 불-충분성

이러한 답답한 상황의 중요한 원인은, 촬영 렌즈에 있다. 렌즈를 선택했다는 인상은 사실 환상에 불과한데, 왜냐하면, 그러한 렌즈들로부터는 말하자면, 마치 보편적으로 동일한 규칙들에 의해 지각되는 것 마냥 똑같은 것만 찍히기 때문이다(멀어지거나 가까워지거나, 다소간의 광도). 그것들의 구성 원리는 상관이 없으며 논의되지 않는다(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와 같은 지극히 드문 예외가 아니라면). 여기서 우리의 토대는 16, 17세기 이후로 전혀 발전한 것이 없는 것이다.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 이미지의 첫 번째 사진 기록 이후에 빛은 구멍을 통해 지나갔고, 더 이후에는 광량을 높이는 유리판(렌즈)를 통해 지나 갔다. 렌즈의 품질은 치명적인 몇몇 결점(곡률, 할로 등등)을 줄여나가면서 계속해서 정교해졌다.
그러한 개선 때문에, 우리가 실재 대상을 잘 포착한다고 생각했던 유리판조합bout de verres 말고는 다른 탐구된 영역은 거의 없었다. 이미지의 완벽하고 완전한 객관성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은 끝장을 본다는 집념 아래 끝없이 정교화될 수 있는 견고하고 객관적인 과학적 방법을 만들기를 원했다. 1870년대 이래의 발전은, 동일한 것, 말하자면(함축적으로) “실재의 좋은 이미지”, 즉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실재의 좋은 이미지를 위해 렌즈가 점점 더 좋아지고, 그 조합, 그 화학적 구성으로부터 가장 좋은 측정calculs을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외적 세계에 대해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과학적 이미지란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정의를 더 밀고 나간다면 그런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결국 어떤 필요에 의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이러 저런 목적 때문에 이미지가 필요하게 되고, 그것을 정교화 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사진 판화의 경우, 우리는 주어진 조건 아래서 특정한  거리에서만 소용 있고, 엄밀한 표준에 비교해봤을 때 상대적으로 가장 왜곡이 적은 렌즈에 의존하고 있는 것 뿐이다. 
대중을 감동시키기 위해 영화 감독은 감정émotion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을 가지고 작업한다. 그들은 ‘과학적’ 이미지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사실, 그들의 작업 전반은 주관적 작업이며, 예술적 확신에 찬 작업이다. 그들이 쓰는 장치는 그들을 내면적 변화, 이미지들의 “회화성”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객관이냐 주관이냐


핵심적인 사례는, <로마Roma>에서의 펠리니의 경우이다.  펠리니는 당대 영화감독이자 옛날 화가중의 하나였다. 이제 막 지하철 공사중인 로마의 지하 로케이션에 이르르자, 펠리니가 그의 스태프에게 돌아서서 말하길: “정말 굉장해” 모두가 기뻐했다. “여길 다 세트로 만들어야 겠어”하자 모두가 당황해 했다!
펠리니는 왜 그렇게 큰 비용을 들여가면서 지하철의 인테리어를 재 공사 하려고 했을까? 이것이 바로 좀 더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이미지의 구성이라는 문제에 관해 영화 렌즈의 문제를 맞닥뜨리는 감독의 모습이다. 그 자신이 그 회화적 재료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그는 어떤 방법으로도 촬영된 실재 세계는 그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기엔 역 부족이라는 것, 그리고 어떤 렌즈를 통해서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확실한 감동을 선사하고자, 그는 현실을 재구성하고 원근체계와 외양을 바꾸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두더지’(로마 지하에 지하철을 뚫었던 기계)는 실제 크기보다 세 배나 더 크게 다시 만들어졌고, 공간의 기하학적 차원과 구조는 변하게 되었다(원근놀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결국 객관적일 필요가 없는 '주관적'이어야만 하는, 즉 실재 대상을 취하기는 하되 동시에 우리가 마치 데생을 하듯이 시야를 대체하는 변환 작업을 수행하는 카메라였던 것이다. 기계를 좀 더 크게 보이도록, 사람들을 좀 더 멀리 있도록, 배경을 좀 더 은근하게 하고, 빛의 명암을 조정하는 방식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는가? 이 질문은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도 아니고, 광학적 혹은 기계적인 것에 대한 단순한 정열도 아니고, 이것은 진정 필요한 것이며, 우린 왜 영화가 이 부분을 놓치려 하는지에 대해 자문해 봐야 한다.
만약 펠리니가 …(중략)… 렌즈 제작자(앙제니외, 니콘…)를 찾아가서 대상의 특정 성질(변조 가능한 왜곡, 광학적 변이)을 관찰할 수 있는 렌즈를 주문 했었다면 기술자는 그러한 요구에 천착하여 재빨리 기술적 해결을 보거나 그러한 필름을 개발했을지도 모르나 그렇지 않았다.
난 개인적으로 광학 기술자들을 만나보았고, 그 질문들을 던져 보았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난 그들이 [주관적 표현에 대해]회의적이고, 때때로는 강력히 반대하는 것을 보았다.

생리적 광학과 심리적 광학

기술자의 광학적 작업은 맹목적 관습들(공식화된 것은 아닌), 그리고 심리적 광학의 놀라운 배제에 기초해있다. 심리적 광학은 사실 테크닉적인 양식을 지시해줄 수 있는 무기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미지의 형태를 구성하고 변주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 즉 생리적이고 역학적 광학은 제작자에게 실질적 토대로 작용하지만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난 지난 해, 꼴레주 드 프랑스의 연구소장이자 생리 광학의 전문가인 뒤부아 뿔셍Dubois-Piulsen 교수와 함께 작업할 수 있었다. 다른 원칙들에 준거한 광학 메카니즘의 문제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던 그는 직접 하이퍼-크로마틱 렌즈를 개발했고, “전통적인” 기술자들을 만났었다. 그는 특히 프랑스 철도청(SNCF)의 기술자와 관련된 전문적 분야에서 시각과 관련된 여러 사례를 언급했다. 예컨대 신호등이 열차 운전자에게 보이지 않아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 이 분야의 전문가인 그의 조언을 요청하였다. 기술자들은 이렇게 설명했다: “노란 불 다음에 빨간 불이 나오며, 이는 운전자에게 정지하라는 신호이다. 그런데, 여러 번 그들은 정지하지 않았다.” 뒤부아-뿔셍 교수는, 어떤 시각적 조건에선 노란 색과 빨간 색이 다른 색으로 보인다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기술자들은 적절한 파동의 노란 불과 빨간 불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항의했다. 과학적 기준들은 이론적으로는 옳으나 현실적인 인간 지각에 있어서는 경우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뒤부와-뿔셍 교수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500미터 정도 길이의 창고에 물을 뿌리고 안개를 만든다. 관찰자들은 색이 그들이 계산한 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생리적 광학에 있어서 많은 기술자에게 이 같은 사고방식은 지배적이다 ― 일반적으로 기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인체 메커니즘을 통과하면서 시지각은 '심리학의 법칙'이라는 다른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날 놀라게 하는 것은 정확히, 과학적 법칙과 예술적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들 간의 이러한 단절이다: 한쪽에서는, 기술적 능력이 지대하고 그 요구들은 정밀하다(지구를 관찰하는 위성의 경우, 다른 층위의 사진, 즉 적외선이 필요하다: 기술적 해결이 쉽사리 가능한 것은 대단한 것이다). 한편 그래픽적이고 예술적인 창조는 몇 천년의 경험을 보여준다 ― 그 연결은 만들어지지 않고  종합적 기획은 맞춰지지 않으며, 광학은 우리가 구시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관습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광학의 변화

관습적인 광학 법칙에 따르는 렌즈에 전적으로 종속되려 하지 않고, 사진적 이미지로서 데생적이거나 회화적인 이미지의 자유와 동등화하는 것을 허용하는 “주관”의 사용으로 나아가기 위해 다른 이미지의 현실화의 원리들이란 무엇일까?

윤곽과 원근체계

어떤 방을 사진찍거나 촬영한다고 가정해보자. 먼저 그것이 데생이라고 치자. 바닥 선ligne de sol, 벽의 선 등을 어디에 둘 것인가? 어디에 인물을 배치할 것인지, 바닥 선에 대해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이 핵심적인 선택들이며, 이것들이 로트렉의 데생, 베르메르와 발튀스Balthus의 데생 간의 큰 차이들을 결정한다. 

화가 혹은 데생가들이 정해진 장소에 한 선―예컨대 바닥선―을 그린다면, 그것은 테크닉적이고 그래픽적이고 본능적이며 감성적인 어떤 이유들 때문이다. 뒤러Drer의 잘 알려진 데생을 보자. 그 선을 1mm 더 연장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뒤러의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일생을 바쳐 완벽하게 하려 한 드문 감수성으로 그린 것이다. 화가들이 완숙기에 접어들면, 어떤 이유, 어떤 순간에 그들은 선을 어떤 장소에 위치시키고―그리고 바로 거기서 그 선은 두터움, 리듬, 진동을 얻는다―그것만의 고유한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도 바로 거기서이다. 회화와 데생에서는 끊임없이 쓰이는 그러한 과정은 관객의 감성을 사로잡는 “무기”이다. 사진적 배치에 있어서는 그런 방식들의 정확성을 왜 도외시하려 하는가?

이제는 동일한 방에서 사진촬영을 혹은 영화촬영을 한다고 해보자. 모두가 동의하는 바는, 인물이 방 안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족하다는 것이고, 광학적 배치도 자동적으로 되어진다. 그렇지만 인물과 연관지어 벽의 앵글을 잡는 것, 이러저러한 장소에 바닥선을 잡는 것은 역시 렌즈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디테일을 제어할 수 없다고, 혹은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평범한 렌즈에 의해서 잡힌 이미지와 광각 렌즈로 잡힌 이미지를 비교해보라, 그리고 바닥선의 위치를 관찰해보라. 그러한 이미지들은 똑같지 않으며, 하나는 어느 정도 네모난 데 비해, 다른 하나는 휘어져 있다. 그래도 확고하고 과학적인 하나의 사진 이미지가 있다면, 어떻게 실재적인 것에 대한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게 되는 것일까?

따라서 관습적인 현재 카메라조차 우린 해석하고 선택할 수 있다. 그러한 선택을 (원근체계 요소부터, 즉 이미지의 해골이나 뼈대로부터 관계해서 시작해 본다면), 선들의 집합에 이어 각 선들이 교차되는 지점을 결정하고, 그러한 으뜸의 기량을 촬영감독에게 부여할 수 있는 카메라 혹은 메커니즘의 창조로 이어가지 말란 법이란 없다. 다른 방향으로 관점의 문제를 제기해보자: 지각은 수많은 이미지가 더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사실 우린 대상을 재빠른 눈으로 보면서 연속적으로 던지게 된다. 유일한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 셈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지를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의 혼합으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화가 앙리 디미에Henri Dimier는 광학적 현상과 관점의 재현에 있어서 다른 메커니즘에 대한 위대한 선지자이자 열렬한 추구자였다. 그는 나에게 그의 광학적 관념들을 설명해주었고(그것은 지금 내가 만드는 이미지들의 토대이다) 다중렌즈 카메라(appareil multi-objectif)를 개발하라고 격려했다: 다중렌즈란, 한 인물을 사진촬영 하거나 영화 촬영할 때, 렌즈들 중 하나는 얼굴을, 다른 하나는 신체의 중심을, 세 번째 것은 (바닥의 경사를 알려주면서)발과 바닥을 향하는 ―정말로 우리가 파편적 비전들을 계속적으로 융합하면서 시각적 이미지들을 구성하는 식대로 렌즈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 원리를 이용해서 1964년에 다중렌즈를 제작했지만, 난 내가 어떻게 풀어야 될 지 몰랐던 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각 렌즈가 포착한 이미지들 간의 연결들, 즉―우리의 내적 메커니즘과는 반대로―여전히 분명히 보이게 남아있는 연결의 문제였다. 

8년 뒤에 데이빗 호크니는 같은 생각을 했다: “단일한 사진적 관점은 쓸모 있지 않다. 그것은 너무 빈곤하다.” 그는 그의 사진들과 풍경들을 찍는 데 있어서 다중의 관점을 취했고, 이러한 다중성이야말로 매우 흥미로운 것이며, 우리의 눈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파편적 사진들을 단지 “융합”하려고만 하지 않고,―내가 원하지도 않았고 감당하려고도 하지 않았던―분명히 보이는 연결들을 그대로 남겨둔 결과, 그는 진정 뛰어난, 그리고 지금은 잘 알려진 작품들을 쏟아냈다. 호크니는 대단한 정식을 취한 셈이다: 즉 현실적으로 단일한 관점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다른 광학적 법칙들은 충분히 연구된 적이 없다는 정식이 그것이다. 

조각할 수 있는 렌즈

전통적 렌즈와 그 획일성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그러한 욕망은, 즉 보마르세 거리의 특수 용품 시장이나 벼룩 시장에서 내가 우연히 발견하고 사게 된, 교정되지 않은 렌즈를 사용하는 데에 이르렀다. 난 그로부터 꽤 많은 것을 수집했다.

나무로 제작된 미세한 판형 앞에 부착하자, 그 렌즈들은 트레이싱 종이 혹은 바닥까지 처리된 간유리에 이미지를 투영했는데, 광학적 교정 없이 우수한 화질을 갖는 그 이미지들은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관점의 시선들, 그 형태들이 관습적 외양을 가지지 않는 광대한 탐험지를 이미 창조하게 된 셈이다. 거기서 나의 관점을 취하고, 나에게 가장 알맞으면서도 가장 덜 관습적인 렌즈를 택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난 또한 다른 관점들의 집합을 창조했다. 예를 들어 난 관점을 한꺼번에 취했는데, 하나는 바닥에 닿아있는 사진 촬영된 집을 향했고, 다른 하나는 부감으로 촬영된 움직이는 사람을 향했다. 이렇게 다른 관점들이 혼합되자 눈은 충격을 받지 않고도, 이것이 정말 신기한 것인데,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또 다른 광학장치

장편 <천사>를 찍은 후에, 난 다른 시도를 해보았다. 난 귀아디Guardi의 그림에서처럼, 그 윤곽들이 진동하는 이미지들을 얻고자 했고, 데셍에서 처럼 주조하고 제어 가능하게끔 되는 사진적 이미지를 단계적으로 ‘건축’할 수 있는 광학적 장치들을 찾았다. 결국 언제나 똑같은 집념인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나로 하여금 수은을 사용하게 한 진동의 관념이리라. 난 양동이에 수은을 채우고, 햇볕이 좋은 날 양동이 위쪽에 거울을 비스듬히 올린 다음, 수은에 가벼운 파장을 준 뒤 그것을 촬영했다.  편집 테이블 위에서 관찰해본 결과, 수은이 파장을 일으키면서 얻어진 그 이미지들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파장 자체에서 기인한 수용적 성질을 제거하면서 그 이미지들을 보존하기 원했기 때문에, 난 수은을 내게 원하는 위상에 응결시키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를 위해 난 굉장히 잘 닦여진 금속판을 모아다가 그 표면을 수은 파도의 윤곽을 따라 조각했다. 한 도예공이 나에게 이를 가르쳐주었고,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필요한 연장을 가르쳐주었다. 난 스스로 많은 금속 거울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얻고자 하는 변형이라는 관념에 윤곽을 주기 위해, 난 금속을 주조하고 조각하여 윤곽을 재현 해낸 셈이다. 그 다음에 난 ‘금속판’위의 피사체와 사람과 풍경의 반사상을 촬영 했고 점차적으로 방법을 개선해나갔다. 난 결국 그것을 ‘주관적 사진’이라 부르기로 했다. 난 거의 200여개의 도판을 만들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20개 정도를 건졌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은 이미지는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리 팽창에 같은 과정을 적용해보니 그를 통해서 볼 수 있는[관점을 취할 수 있는] 투명한 형태들 또한 얻을 수 있었는데, 그 결과물은 금속 작업에 의해 얻어진 것보다는 만족스럽지 못했고 게다가 제어하기도 어려웠다. 난 혼자 제작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난 날 한시라도 도와주는 공예가 및 유리공예가와 함께 작업했다.

이론적으로라면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프로젝트는, 구도를 잡을 때마다 필요에 다라 렌즈를 ‘조각’할 수 있는 것, 즉 선택된 지대에 따라 형태와 곡률을 변주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가로 40cm, 세로 40cm, 두께 3mm의, 따라서 매우 무른 납 위에 매우 반사가 좋은 재료(마일라)를 덧칠해서 공간 안에서 거울을 ‘주조’했다. 

예를 들어, 난 한 눈에 땅이 보이고,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나무가 보이고, 멀리 마을이 보이는 곳에 서서, 그 요소들 각각이 기능하는 거울의 곡률과 주조형태를 결정했다. 이러한 장치는 결국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명 났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것’을 변형 시킨다는 것은 지나치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의 조각 가능한 거울은 한 번 사용하면 납작하게 하는 프린터를 통과함으로써만이 그 형태를 복원했다. 프린터를 통과하는 매번 그것을 다시 되돌리기란 어려웠다. 

그래서 난 작업된 그러나 고정된 거울들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난 열 개 정도를 가지고 다녔고, 많은 조합 속에서 각 주제에 가장 잘 맞는 것을 골랐다.

난 다른 체계를 추구했으며, 그에 대해 기술하자면:

가로 2cm 세로 2cm(구부러지기에 가장 작은 크기)의 80개의 거울들이 있었고, 그 미세 거울들 각각을 받침판 위에 충분히 길게 붙여졌다. 받침들 전체는 평행 6면체를 형성하고, 난 그 각각을 밀고 당길 수 있었다(알렉산드르 알레제이프와 클레어 빠께의 핀스크린과 공통점이 있다). 난 그러한 장치를 통해 반사된 외부 세계의 이미지를 촬영하기만 하면 됐다.
매우 작은 표면을 가진 거울로 그러한 원리를 추구하는 장치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것은 최근에 광자 각각을 포착하는 거울들을 이용하는 텔레비전 모니터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릴 몽상하게 한다. 한 번 이러한 광학적 배치가 한번 수행되자, 난 이중노출이라는 다른 과정에 의한 이미지의 재료, 혹은 공간적 배치의 재료에 더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풍부하게 하려고 했다. 사실, 난 광학을 천문학에 적용한 선구자적 실천에 관심이 있으며, 매 순간 거울 표면을 달리해 대기의 교란을 포착하는 것과 같은 방법에 관심이 있다. 그것은 유연하고 탈 형상화 될 수 있는 미세 렌즈의 발명에 다름아닌 것이다.

난 현재 있는 사진과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들을 상상할 수 있고 얻을 수 있으리라 항상 생각한다. 그리고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실현되어야 할 다른 광학적 메커니즘이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은 1991년 봄 8호 르뷰에 코리제에 실린 그룹 아트 퉁과 인터뷰(Entretien de Patrick Bokanowski avec le Groupe Art Toung, «Styles d'image cinématographique», Revue & Corrigée, n° 8, printemps 1991, p. 22–25.)이며, 이자벨 쇼세의 편집으로 1992년 1월 브레뜨 11호에 실렸다.
2007년 9월 저자와의 교신을 통해 부분 당시 상황에 맞게 부분 수정후 실험영화 잡지 나방에 수록되었다.

Paru dans « Revue et corrigé » N°8 1991
Entretien avec le groupe Art Toung , mis en forme par Isabelle Chauchet
dans « Bref » N°11 janvier 1992.
Modifié et complété pour la revue «N'Avant» du Septembre 2007
(번역 : 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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