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의 잔상

서현석


우리는 생명을 위협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과거의 이미지가 비자발적으로 빠르게 떠오르는 현상을 일컬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고 표현한다. 고대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주마등(走馬燈)은 온도가 높은 공기가 상승하는 원리에 따라 회전하는 이미지를 등불로 투영하는 장치로, 주로 말의 그림을 그려서 비추어 보았다. 회전하는 말의 그림자는 말 그대로 달리는 것처럼 영사되었다. 

주마등과 죽음과의 연관성은 물론 죽음에 가까운 체험을 비유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지만, 좀 더 미묘한 또 다른 연관성에 대해 생각해봄 직하다. 실제 주마등이라는 장치는 그 자체로서 이미 죽음을 떠올리는 시적 상징성을 갖는다. 실물도 아닌 그림자가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일종의 소멸의 미학이 작동하는 셈이다. 

소멸의 미학은 유럽의 매직랜턴, 그리고 19세기 전반에 걸쳐 발명된 각종 광학완구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페나키스토스코프Phenakistoscope, 조에트로프Zoetrope, 쏘마트로프Thaumatrope,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 등 간단한 구조로 된 광학완구는 한정된 수의 이미지를 빠르게 연속적으로 지나가게 하면서 착시현상에 의한 움직임을 연출한다. 

이 장난감들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이미지들이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져야 한다. 속도에 의해 생겨나는 결과는 가상적인 것이다. 개별적인 이미지를 관찰할 수 있게 되면 장치의 기능은 사라진다. 

‘현재’란 체험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제이다. 현재를 감지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제에 관한한 언어는 광학완구와 같다. 정확성을 기하여 말한다면, ‘지금’이란 기표는 끊임없이 기의를 상실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장 엡스탱Jean Epstein은 현재의 이러한 모호함을 시각에 기반을 둔 것으로 설명한다. “현재를 감지하기 위해 시계를 바라보는 순간, 엄격히 말하자면 현재는 이미 없어진 상태이고, 또 엄격히 말하자면 현재는 다시 나타나 있다.” 현재는 측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현재의 속성으로부터 인간의 사유는 자유로울 수 없다. 현재에 대해 사유를 하는 동안 그 현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엡스탱이 표현한 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했다.”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역시 ‘지금’이 끊임없이 소멸되는 이러한 상황이 시각의 문제임을 간파했다. 보이는 것에 대한 감각과 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이는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지를 하고나면 감각된 ‘지금’은 이미 사라져 있다. 

우리의 눈은 순간적인 것을 감지할 수는 있으나 포획할 수는 없다. 우리의 망막에 잔상이 남기는 하지만 이는 영속적인 기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소멸할 수밖에 없는 잠정적인 것이다. 결국 시각은 상실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며, 이것이 현재를 체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미래는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순식간에 그리고 지속적으로 과거로 밀려나가며, 현재라는 개념이 가리키는 바가 있다면 이러한 속도감을 불안정하게 감지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미디어 철학가 리오 차니Leo Charney의 말대로, “현재는 미래와 과거가 충돌하는 접점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현재란 과거와 미래가 공모하여 만드는 서자 같은 개념이다. 

차니는 이러한 불가능한 시제가 근대적 시간 개념의 기반임을 밝힌다. 근대성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은 ‘순간적인 경험’에 있다는 것이다. 차니는 이러한 근대성의 사상적 기원을 영국의 평론가 월터 페이터Walter Pater에서 찾는다. 19세기 중후반 페이터는 영속적이고 불변한 것에 가치를 두는 일반적인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에게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경험은 순간적인 자극이라는 생각을 펼쳤다. 그에 따르면 순간적인 인상과 단상은 그 자체로서 특별하고 독자적인 가치와 쾌락을 전달한다. 페이터의 이러한 생각이 당시에 얼마나 많은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만하다. 

차니는 페이터가 단호한 태도로 피력한 미학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체험’의 시초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차니가 추적하듯, 페이터가 제시한 순간의 미학은 하이데거의 시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엡스탱의 영화미학으로 이어졌다. 

엡스탱은 순간으로서의 시간의 체험을 가장 정확하게 표출하는 장치로 영화를 주목한다. 영화에서 현재는 끊임없이 인간의 지각을 빠져나간다. 그럼에도 관객은 분명 불가능한 현재를 체험한다. 영화는 단지 불가능한 시제를 표출하는 능력을 가진 것 뿐 아니라, 아예 이러한 불가능함을 그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기계적 장치이다.

사진은 가장 일반적인 표현에서 정확하게 그 기능이 드러나듯이, ‘순간을 포착’한다. 따라서 인화된 사진 이미지는 과거시제를 갖는다.

뤼미에르 형제는 그들이 발명한 영화에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물론 자신의 발명품의 인기에 대한 이 회의적인 예측은 빗나갔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말은 영화의 존재론적 속성에 관한 하나의 시적인 진실을 시사한다. 영화를 체험한다는 것은 항상 미끄러지는 현재로 이루어지는 불완전한 지각현상이다.

영화가 사실을 기록한다는 사실에 영화이론가들은 오랫동안 주목해왔다. 영화 이미지에 시제가 있다면 과거라는 생각이 주를 이루었다. 촬영된 사진은 과거의 한 시점에 존재했던 순간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을 비롯한 사실주의 영화이론가들이 우선적으로 중시한 영화의 기능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영화 이미지가 과거 지향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사진과 달리 고정되고 정지된 이미지로 체험되는 매체가 아니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상영관에서 영화의 프레임이 스크린에 머무는 시간은 찰나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 있다. 


임고은의 <사진 찍다>(2004)는 작가가 한 장의 사진을 찍는 순간을 화두로 사진과 영화가 갖는 매체적인 특징들에 대해 시적으로 묵상한다. 사진 한 장이 비디오로 보여질 때는 사진 이미지의 총체성은 보존될 수 없다. 사진은 이미 여러 개의 픽셀로 해체되었다. 기록된 하나의 순간은 과거의 한 시점이지만, 비디오로 영사될 때는 여러 개의 같은 프레임들로 점증된 복제들을 바라볼 뿐이다. 하나의 순간이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정지된 이미지를 보는 것은 한 장의 인화된 사진을 들고 바라보는 것과는 구조적으로 전혀 다른 체험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부재 속으로 미끄러지는 현재들로 이루어진, 과거지향적인 기표체계이다. 영화 속에서 한 장의 사진이 제시된다 하더라도, 사진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과거의 기록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환영일 뿐이다. 현재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지된 이미지들로만 이루어진 크리스 마커Chris Marker의 <La Jetée>(1962)는 사진 이미지가 영화로 보여질 때의 모순적인 양가성을 탐구한다.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선형적인 시간은 시간여행이라는 허구적인 상황을 통해 해체되고,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된다. 주인공은 욕망의 대상이 존재하는 과거로 돌아가 이미 지나간 시제를 현재로 환원하지만, 그렇게 다가온 현재는 손에 잡힌다고 생각하는 순간 빠져나간다. 모든 현재가 그러하듯 말이다.

<La Jetée>에서 주인공으로부터, 우리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은 과거 속의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현재’의 실현 가능성이다. 정지된 이미지는 현재가 과거로 미끄러지는 것을 유보하는 듯하지만, 실상 현재는 영화를 보는 동안 끊임없이 프레임의 움직임을 따라 소멸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주인공은 소멸하는 현재와 운명을 같이 한다. 

‘선착장’과 더불어 여성명사로서 ‘던져진 것’을 중의적으로 의미하는 ‘La Jetée’라는 제목을 통해서도 생각할 수 있듯이, 영화라는 매체에서 현재라는 시제는 어쩔 수 없이 던져질 수밖에 없다. 시간은 정지될 수 없으며, 주인공의 운명이 시사하듯, 이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이다. 

<La Jetée>에서 유일하게 움직임을 갖는 것은 주인공의 과거 속 연인의 눈꺼풀이다. 이 신비로운 장면에서 여인의 눈꺼풀은 현재의 생경한 생명력을 재현하는 듯하지만, 이는 현재가 지속될 수 없음을 상기시켜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여인이 눈을 깜빡하는 것보다 빠른 ‘눈 깜짝할 사이’에 프레임은 지나간다. 

주마등으로부터 이드위어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에 이르기까지 영화 이전의 광학장치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가는 말과 연루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움직이는 피사체에 대한 호기심은 고대부터 영상문화의 기반으로 작용했다. 


마이브리지는 주프락시스코프Zoopraxiscope라는 장치를 고안하여 말이 달리는 모습을 연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움직이는 사진을 처음으로 보여준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관심은 사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움직이는 모습에 있었다. 육안으로는 제대로 관찰할 수 없는 빠른 움직임을 기록하고 분석하는 능력이야말로 사진이라는 장치가 그에게 준 큰 선물이었다. 

주프락시스코프 안에서 말이 달리기 시작하면 사진의 환영적인 지속성이 사라진다. 

마이브리지가 사진에 움직임을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발명하지 않은 이유는 사진과 영화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영화는 ‘정지된 순간’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일축해버리는 장치이다. 마이브리지의 사진들이 주프락시스코프보다는 출판물이라는 인쇄된 형태로 더욱 널리 보여지고 알려졌던 이유는 영화가 배제한 ‘현재의 지속’이라는 사진의 기능적 속성 때문이었다.

바쟁은 고대의 미라로부터 회화, 그리고 사진으로까지 이어지는 인류문명의 중요한 욕망 한 가지를 논하고, 이를 영화의 존재론적 속성으로 규정했다. 바로 사실의 보존이다. 하지만 마이브리지의 선택은 이미지의 ‘진화’ 과정에서 영화가 사진의 중요한 기능을 도태시켰음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영화는 자연현상을 ‘보존된 과거’에서 ‘포착할 수 없는 현재’로 다시 환원시킨다. 포획된 자연을 불가능한 현재에 방생한다. 

영화는 사실을 보존하는 매체라기보다는 소멸을 재현하는 매체이다. 

마치 피리 소리에 유도되어 차례로 강물에 빠져 죽는 마을의 쥐들처럼 영화의 모든 프레임은 앞선 프레임의 뒤를 따라 영사기의 게이트를 거치면서 순간의 삶을 지나쳐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시간이라는 피리 소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디지털 시대에 찰나로서의 영화 이미지의 정체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비디오나 디지털 영상에 사진적 이미지란 실존하지도 않는다. 기록된 이미지란 없다. 상영을 할 때에만 코드화된 정보가 사진적 이미지를 재구성할 뿐이다. 디지털 영상이야말로 불가능한 시제로서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셈이다.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 때만 하더라도 편집기사나 영사기사는 필름을 빛에 비추어보곤 했다. 영화는 하나의 기록된 이미지로서 분명 물질적인 기반을 가졌던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선구적 조형예술가로 알려진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는 <납덩어리를 잡는 손Hand Catching Lead>(1968)이라는 1968년의 16mm 필름에서 프레임 밖의 위쪽으로부터 아래로 반복적으로 떨어지는 납덩어리를 잡으려는 손을 보여준다. 손은 때로는 납을 붙잡아 모양을 변형시키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놓치고 흘려보낸다. 

로잘린 클라우스Rosalind Krauss의 말대로 세라의 작품에서 떨어지는 납의 움직임과 한 방향으로 선형운동을 하는 필름 간에 상징적인 상호연관성이 형성된다면, 납이 손에 잡힌 순간으로 영화가 마무리되지 않고 납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손으로부터 빠져나가는 납은 하나의 프레임을 고정시켜 오랫동안 정확하게 관찰할 수 없다는 사실과 또 다른 연관성을 만든다. 손을 빠져나가는 납덩어리처럼 프레임은 우리의 눈을 빠져나간다. 손에 남는 광물의 촉각적 여운처럼 우리의 눈에는 잔상이 남는다. 


석성석의 <1998>은 개별적인 사진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가까스로 인식할 수 있는 흐린 이미지들은 작가의 친구나 가족, 우연히 만난 타인, 이름을 알 수 없는 장소의 풍경 등 작가 주변의 일상적인 순간들을 즉흥적으로 포착한 것들이다. 이 작품은 일종의 일기영화인 것이다. 포착된 하나의 이미지는 한 개의 프레임을 차지하여 빠르게 지나간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순간의 기억이 지나간다.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러고 보면 <1998>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죽음에 가까운 영화인 셈이다.

<1998>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이미지는 잔상으로 오래 머물지 않는다. 이미지에 숨겨진 사적인 감정과 생각이 차단되었기에 더욱 덧없이 소멸된다. 이 작품에서 영화적 시간은 작가가 체험했던 과거의 시간,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지속적인 시간과는 전혀 다른 물리적 기반과 리듬을 갖는다. 영화가 기록해서 보여주거나 지시하는 과거의 시공간은 없어진다. 많은 이미지들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만드는 일정한 기계적 속도감이 각 이미지들에 내재하는 개별적인 의미들을 대체한다. 감정은 부재하고 속도만 남는다. 

프레임이 갖는 찰나의 미학에 충실할 때 영화는 기억보다는 망각에 가까워진다. 보존보다 상실에 봉사한다.

<1998>에서 작용하는 시제의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석성석은 1998년에 촬영한 이 개별적인 단편들을 2002년에 편집하여 연결함으로써 하나의 작품으로 상영하였다. 작가가 2002년에 되돌아보는 1998년의 이미지는 대과거가 되는 셈이지만, 그렇다고 관객이 과거를 기억하는 작가의 시제에 안착하고 대과거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1998년과 2002년이라는 두 시점은 부재의 간극을 복수화할 뿐이다. 

어쨌거나 관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2002년에 회상하는 1998년이라는 과거가 더 멀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것도 허상이다. 모든 이미지는 그 어떠한 경우에서나 게이트에 당돌하는 순간 소멸하는 개별적 요소일 뿐이다. 

기억이란 고정되고 특정한 시공간의 기록이 아니라, 돌발적이고 무질서한 찰나 혹은 그 조합일 뿐이다. 

단발적이고 파편적인 순간의 자극은 근대적 시각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구성적 요소이다. 

샤를로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근대성을 일시적이고 가변적이며 불확정적인 것으로 규정했으며, 이러한 시공간적 특징들은 인간의 지각과 욕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권태와 우울은 이러한 근대성의 산물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 대한 보들레르의 영향은 절대적이지만, 특히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욕망과 공간이 갖는 함수적인 관계에 대한 보들레르의 통찰력을 가장 충실하게 보여준다. 이 미완성의 글에서 벤야민은 파리의 거리에 들어선 아케이드가 도시인의 지각과 감성을 어떻게 바꾸는지, 이러한 변화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조심스레 관찰한다. 

아케이드 안에서 혼란스럽게 병렬된 볼거리들을 두서없이 지나치는 소요자flâneur는 즉흥적이고 무작위적이며 돌출적인 지각적 체험을 한다. 아케이드는 다중적인 의미의 층을 가진 비선형적인 공간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아케이드라는 건축구조는 인간의 지각을 파편화시킨다. 벤야민은 매체가 곧 메시지임을 이미 오래전에 간파한 것이다. 

아케이드가 인간의 지각에 끼친 영향을 표현하기 위해 벤야민이 고안한 글의 구성방식은 글 자체를 형식적으로 파편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미완성의 글은 단편적인 생각의 흔적, 문맥도 없이 적힌 인용구, 인용에 대한 해석 등으로 이루어져있고, 어떤 것이 인용이고 어떤 것이 자신의 생각인지 명확하게 구분하지도 않았다. 이 파편들은 마치 아케이드의 상점들처럼 서로 밀접한 인과관계나 논리적인 전후관계를 갖지 않고 비선형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글은 논문보다는 메모에 가깝고, 독자는 마치 방향이나 목적도 없이 아케이드를 기웃거리며 지나가듯 서로 독립적인 생각의 디스플레이를 지나치면서 텍스트를 체험하게 된다. 독자는 소요자가 된다. 벤야민은 자신의 글쓰기 작업을 하나의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진행중인 이벤트로 여긴 것이다. 

벤야민의 글쓰기는 텍스트를 해독과 분석의 고정된 대상으로 평면화하는 대신 수행적이고 가변적인 상황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불가독성이야말로 ‘진행중인 이벤트’로서의 영화가 갖는 중요한 속성이기도 하다.

프로젝터에서 필름의 운동이 정지되는 경우, 즉 하나의 프레임이 연속적인 운동성 안에서 ‘영화’이기를 거부하고 ‘사진’이기를 고집할 경우, 어떤 일이 생기는 지는 잘 알려져 있다. 온도에 약한 물질로 이루어진 필름은 영사기 램프의 강한 열을 견디지 못하고 순식간에 거품을 일으키며 녹아버리고 만다. 이러한 폭력적 상황은 스크린에 그대로 투영된다. 

스탠 브리키지Stan Brakhage는 정지된 필름이 녹아버리는 광경을 <Dog Star Man>(1962-64)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브리키지는 아기의 이미지와 필름이 녹는 효과를 충돌시킴으로써 생명과 소멸의 몽타주 효과로서의 영화를 형상화했다.

극영화인 잉마 베르히만Ingmar Bergman 감독의 <페르소나Persona>나 몬티 헬만Monte Hellman 감독의 <Two-Lane Blacktop>에서도 필름이 녹는 이미지는 관객에게 충격을 주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 바 있다. 두 영화에서 이 파괴/파계적인 이미지는 폐쇄적인 내러티브 시공간의 연속성을 더불어 파괴한다.

영화는 결국 지속적으로 움직일 때만 스크린에 투사되어 관객이 지각할 수 있는 본질적인 특성을 갖는다. 

움직임이야말로 영화미학의 선각자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가 중시한 영화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팽이’라는 의미를 지닌 ‘지가 베르토프’라는 예명을 통해서도 그는 밝히고 있듯, 영화는 계속 움직일 때만이 그 기능을 지속할 수 있다. 장치가 멈추면 영화적 현상은 사라진다.  

동시녹음을 하면서 촬영을 할 때 녹음기사는 녹음장비가 녹음을 시작하면 "Speed"라고 외침으로서 음향이 문제없이 녹음되고 있음을 감독과 촬영감독에게 통보한다. 여기서 ‘속도’라는 기능적인 속어에는 영화의 공공연한 비밀이 담겨 있다. 영화적 현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속도’이다.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상기한 바대로, 속도는 근대성으로부터 현대로 이어지는 인간의 감성적 변화를 함축하는 개념이다. 비행기, 초고속 기차, 전화, 리모트컨트롤로 조종하는 텔레비전, 인터넷 등 빠른 속도의 변화를 체험하게 하는 기계적 장치들은 간극에 대한 인간의 인지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고속으로 질주하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창밖의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은 우리의 현실을 이루는 방대한 물리적 구성요소들을 무의미한 간격으로 일축해 버린다. 속도 속의 시공간은 빠르게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기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소멸인 것이다.

비릴리오는 기계문명이 야기한 이러한 소멸의 미학이 가장 확연하게 두드러지는 현상으로 영화를 꼽는다.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 누락된 시공간의 정보는 기록을 하면서 카메라가 영원히 상실한 것이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부분적인 기억상실을 전제로 하는 매체이다.

기억으로부터 빠져나간 부재는 영화관 안에서 관객에게 부재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차적인 망각상태, 즉 영화의 환영주의적illusionist 속성은 상업적인 극영화를 성립시키는, 극영화에 대한 관객의 몰입과 쾌락을 가능케 하는 문화적인 유산이다. 

엡스탱은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을 밝힘에 있어서 영화가 단지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이라는 기술적인 사실을 중시한다. 영사기는 순간적으로 빛을 발사하고 이에 따라 아주 짧은 순간동안 정지된 이미지가 스크린에 투영된다. 스크린에 투영되는 이미지는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관객의 감각을 미적으로 자극하면서 말로는 구체화할 수 없는 감흥을 남긴다. 즉, 영화적 체험이란 비이성적이고 불특정하며 불완전한 것이다. 엡스탱은 이러한 영화의 기본적 속성을 일컬어 ‘포토제니photogénie’라 하였다. 

차니가 강조하듯이, 엡스탱은 ‘포토제니’를 명료하게 정의내리는 것을 거부하였다. 포토제니는 언어의 망을 빠져나가는 감각을 일컬으며, 이를 명확하게 언어화한다면 더 이상 포토제니가 아니다. 필름을 고정시키면 더 이상 영화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엡스탱은 포토제니를 손을 미끄럽게 빠져나가는 비누에 비유했다. 

엡스탱이 ‘포토제니’를 중심으로 하는 미학적 관점을 편 시기가 미국과 유럽에서 영화가 급속도로 오락산업으로서의 입지를 굳힌 시점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영화가 문학적인 이야기구조에 의존하고 관객이 허구적인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도록 강요하는 산업화된 영화의 헤게모니 속에서 엡스탱은 영화가 가진 가장 근원적인 매체적 속성에 대해 성찰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엡스탱이 포토제니의 미학을 발표한 이후 할리우드는 음향 기술을 도입하였고, 이에 따른 인력, 경영, 제작 상의 총체적인 구조적 변화를 겪게 된다. 고전적인 내러티브 구조의 완성과 환영주의적 시공간의 강화는 음향 기술의 도입을 계기로 가속화된다. 순간에 충실한 엡스탱의 아방가르드 미학은 그야말로 순간 동안 발전했다. 물론 그 영향력은 아직도 남아있지만 말이다.

아방가르드라는 군사용어는 죽음을 내포한다. 전장에서 척후병은 먼저 죽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미학이 곧 소멸의 미학임을 엡스탱은 다층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1924년에 페르낭 레제Ferdinand Léger가 더들리 머피Dudley Murphy와 제작한 <기계적 무용Ballet mécanique>에는 개별적인 프레임 촬영을 하여 마치 이미지들이 깜빡거리듯 불연속적으로 빠르게 흐르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애니메이션 기법이면서도 개별적인 프레임들 간의 연속적인 유사성이 없어서 착시현상에 의한 동작의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1960-70년대 미국 실험영화의 중요한 맥을 이루는 ‘점멸영화’, 혹은 ‘플리커영화flicker film’의 기원적 ‘순간’이다. 

베르토프의 기념비적인 작품 <카메라를 든 사람Chelovek s kino-apparatom>은 플리커 영화의 또 다른 대표적인 선례이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빠른 리듬의 몽타주는 영화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던 이미지들을 한 프레임씩 보여주면서 순식간에 흘러간다. 영화적 체험은 카메라나 영사기의 기계적인 움직임에 의한 착시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은 빠르게 흘러가는 불연속적인 흐름에 의해 새삼 두드러진다. 영화가 묘사하는 죽음과 탄생이라는 인간적 체험 역시 영화적 장치에 대한 은유가 되는 셈이다.

플리커영화를 대표하는 폴 샤리츠Paul Sharits의 <T,O,U,C,H,I,N,G>는 제목부터 역설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프레임은, 현재라는 시제는, 잡을 수 없다. 촉각이라는 지각적 반응에 의해 포획되지 않는다. 현재와의 접촉이 있다면 제목을 구성하는 글자들의 사이에 개입된 쉼표처럼 짧다. 

이장욱의 <echoed silence>라는 16mm 작품에서 시간과 공간의 안정적인 결합은 불완전하게 해체된다. 작가가 실험한 여러 기법 중에 ‘눈에 띠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탈관습적인 구성으로, 작가는 다른 공간에서 촬영된 이미지들을 두 축으로 놓고 두세 프레임씩 교차시키며 연결하여 빠르게 지나가는 이미지들이 깜빡거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분절된 형태로나마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갖도록 했다. 한 특정한 시공간에서 기록된 연속적인 사건이나 동작은 나름대로의 불완전하지만 선형적인 흐름을 갖고 진행되는 한편, 파편화된 이미지 사이에 끼어든 다른 시간대의 사건과 끊임없이 충돌하며 불연속적인 파장을 만든다. 스크린은 발작적으로 진동하는 파편들의 흔적도 남지 않는 파장으로 퍼득거린다.

결국 <echoed silence>의 이러한 구성은 내러티브의 전달을 위해 1910년대부터 활용된 교차편집이라는 시공간의 구성방법에 충실할 셈이지만,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흐름이 관객에게 사실적으로 혹은 극적으로 전달될 가능성은 거의 죽어 있다. 각 절편의 프레임 수가 적어서 에이젠쉬테인의 몽타주 시퀀스처럼 두 이미지가 충돌하여 변증법적으로 ‘제 3의 의미’를 생성할 겨를도 없다. 

<echoed silence>에서 두 시공간이 충돌하여 새롭게 생성되는 것은 기록된 이미지들에 내재하는 시공간과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새로운 영화적 시공간, 즉 포토제니이다. 포토제니는 “시간과 공간상으로 동시에 변화하거나 이동하는 것”이라는 엡스탱의 설명을 따른다면, <echoed silence>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영화다운 셈이다. 영화는 동작과 변화 그 자체인 것이다. 

<echoed silence>에서 우리의 시각을 현란하게 뒤흔드는 것은 프레임들의 파동이라기보다는 간극의 파동이다. 비릴리오의 말을 빌자면, 부재의 파격이자, 망각의 파열이다. 제목이 시사하는 바대로, 남는 것은 부재의 잔상이다.


<카메라를 든 사람>의 마지막 몽타주에서 번개처럼 지나가는 이미지들 중에는 편집기사이자 베르토프의 아내인 예리자베타 스빌로바Yelizaveta Svilova의 두 눈이 클로즈업으로 보인다. 스빌로바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은 영화 전체에서 보여주었던 여러 노동자들의 기계적인 동작들을 연상케 한다. 편집은 노동이고, 그렇기에 순수한 의미에서의 ‘움직임’이다. 스빌로바의 눈은 아마도 프레임 밖에서 빠르게 지나가고 있을 프레임들을 검토하는 듯하다. 생산라인을 빠르게 지나가는 생산품을 검사하는 직공처럼
스빌로바의 눈은 영화의 작은 찰나가 될 뿐인 이미지들을 검토한다. 

노동은 시간과 공간을 세분화하는 행위지만, <카메라를 든 사람>의 마지막 몽타주에서 베르토프는 그 세분화의 한계에 대해 묵상하는 듯하다. 생산이 아닌 소멸의 역학에 근접한 것이다. 베르토프가 빠르게 관료화되어가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베르토프는 보여준다. 영화 만들기는 노동이다. 한편으로 영화란 붙잡을 수 없는 감각의 잔상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을 섞은 것만으로도 그가 살았던 사회에서는 이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루이 브뉘엘Luis Buñuel은 자신이 평생 만든 모든 영화들을 공터에 모아 놓고 불태워버리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브뉘엘다운 이 과격한 유머 속에는 소멸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소멸에 대한 공포가 들어 있을 것이다. 모든 영화는 그에게 있어서 소멸과의 대면이었다. 싫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을 한꺼번에 해치우고자 하는 것도 브뉘엘다운 발상인 것이다.

영화에 관한 한, 우리를 유혹하는 모든 것은 타나토스에 봉사한다. 

스빌로바의 깜빡거리는 눈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영화적 이미지를 식별하고 있었을까? 아니, 얼마나 정확하게 망각의 영역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일까?

EX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