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스-우스-몽투스 Trás-os-Montes_안토니우 레이스 & 마르가리다 코르데이루 António Reis & Margarida Cordeiro

트라스-우스-몽투스 Trás-os-Montes_안토니우 레이스 & 마르가리다 코르데이루 António Reis & Margarida Corde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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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ugal / 1976 / Color, B&W / Sound / 111min / DCP

Description

문자 그대로나 모양에 있어서나 유럽의 바깥에서 자라난 포르투갈 영화는 종종 세계 그 자체처럼 보이며, 자신만의 페이스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제거된 작품이 진화한 반-자율적인 영역처럼 보인다. 살라자르의 독재로 잃어버린 시간과 수 십 년 동안의 압제 아래 억눌린 에너지, 깊게 자리 잡은 농업의 전통과 뒤늦게 도착한 산업화, 지역 역사와 신화의 광대한 저장고이자 살라자르 이후 시대의 생생한 영화  – 세계에서 가장 풍성하고 독특한 영화 문화를 가진 곳 중 하나인 포르투갈에서 모두가 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는 여러 명백한 이유로 가시적으로 드러나기는 했지만, 오늘날의 탁월한 영화 감독의 사례로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안토니오 레이스일 것이다.

여전히 포르투갈 밖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대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연결점인 레이스는 1960년대에 시네마노보(Cinema Novo)의 영화감독들, 그리고 올리베이라와 함께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77년부터 1991년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페드로 코스타, 후앙 페드로 로드리게스 등의 제자가 있었던 리스본 연극영화학교(Escola Superior de Teatro e Cinema)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장 로슈의 표현을 빌자면, “불안을 만드는 사물들(disquieting objects)”이었던 1970년대의 몇몇의 영화와 1980년대에 그의 부인 마르가리다 코데이로와 함께 만든 영화들은 다큐멘터리와 픽션, 민족지와 시를 통합하였으며 이것들이 때로는 화해 가능한 한 쌍으로, 때로는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작품이었다.

이 부부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트라스-우스-몽투스>(1976)와 <아나(Ana)>(1982)로 두 영화 모두 포르투갈의 거친 북동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제작하는 동안, 이 영화들은 내셔널 시네마 혹은 심지어 국가의 특성을 정의하려는 시도로 묘사되고는 했지만 레이스와 코르데이루의 영화는 그보다는 더 겸손한 영화였다. 그것들은 헌신적인 영화이며, 거기에는 이토록 머나먼 잊혀진 나라 안의 잊혀진 가장자리, 매우 주변적인 곳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그곳의 사람들과 땅과 관계 맺는다라는 인식이 놓여 있다.

1927년 포르토의 외곽지역에서 태어난 레이스는 영화에 헌신하기 전에는 독학하여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시를 출판하는 예술가였다. 20여년의 휴지기 이후 장편 영화 제작으로 돌아온 올리베이라는 레이스에게 <봄의 제전(Acto de primavera)>(1963) 제작을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레이스는 파울로 로샤(Paulo Rocha)의 브레히트적인 작품 <움직이는 삶(Mudar de vida)>(1966)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이 작품 역시 <봄의 제전>과 마찬가지로 시골의 비전문 배우가 연극한 픽션이었다. 전형적으로 민족지적 접근을 사용하는 상황에 픽션을 적용한다는 생각은 레이스의 유산의 핵심을 구성하는 영화를 알린다.

정신과 의사였던 코르데이루는 리스본의 미구엘 봄 바르다 요양소에서 일하면서 그들의 첫 협업 작품 <하이메(Jaime)>(1974)의 주제를 발견한다. 그녀는 반평생을 그곳에서 살다가 1969년에 죽은 편집증적 정신분열증 환자 하이메 페르난데스(Jaime Fernandes)의 작품을 발견했다. 1960년대가 되기 몇 년 전, 페르난데스는 펜과 연필, 수은에 적신 성냥개비로 이상하고 강박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이메>는 또 다른 급진적인 영화 감독 커플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특이한 전기적 초상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Chronicle of Anna Magdalena Bach)>(1968)의 유물론적 접근을 떠올리게 한다.

당사자가 부재한 와중, <하이메>는 그의 삶을 추적하는 것을 거부하는 대신 남겨진 것들에 집중했다. 그의 그림, 그의 글, 그가 살았던 장소 등. 페르난데스는 오직 영화의 시작과 끝에 빛바랜 사진을 통해서만 등장한다. 코데이로와 레이스는 페르난데스의 빽빽하게 얽힌 스케치의 세부를 클로즈업 하여 보여준다. 이는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작품(Art Burt)으로, 새와 소, 이리와 반인반수가 등장하는 동물 우화집이다. 대부분은 이집트 예술의 양식처럼 눈이 하나만 그려져 있고, 균형이 맞지 않으며 팔다리가 종이의 가장자리까지 닿을 만큼 뻗어 있다(페르난데스의 작품은 리스본의 굴벤키안 재단(Fundação Calouste Gulbenkian)에서 전시되었으며, 파리의 Art Brut Connaissance et Diffusion의 콜렉션의 일부이다). “나 이외에 아무도 없다”, “하이메는 이미 여기서 8번 죽었다”와 같은 몇몇의 구절이 적힌 노트의 페이지를 보여주는 숏과 때때로 등장하는 화면 밖의 목소리(그의 미망인과 함께 수용된 환자들의 목소리)는 무엇보다도 페르난데스가 한때 알았고 그의 생을 보낸 고독한 요새인 시골이라는 물리적 환경에 몰입하는 구두점으로 기능한다. 지하의 운율과 연관성으로 가득 찬 <하이메>는, 두 갈래로 나뉜 페르난데스의 삶의 자장속에 그의 때늦은 예술적 결과물을 위치시킨다. 예술에서의 생생한 경험을 볼 수 있으며(드로잉의 기하학적 패턴이 반영된 기숙사 채광창의 모양), 수수한 서정성의 한 통로에서 페르난데스의 초현실주의 비전은 그의 목가적인 뿌리(옥수수의 원 안에서 펼쳐진 우산, 자신의 그림자를 조금씩 뜯어 먹는 방 안의 염소)와 합쳐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결코 그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정하지 않는다. 영화의 의도는 더 겸손하고 직접적이다. 이 작업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그리고 이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을 확언한다. 헤더(heather) 조각으로의 놀라운 장면 전환은 처음으로 컬러가 나오는 부분인데, 외부 세계를 상기시키는 많은 것들 중 하나인, 요양원 뜰 안에 있는 동거인의 세피아 톤 이미지를 방해한다. 카메라가 정신병원의 외부 벽 창문을 통해 원형 뜰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하이메>는 주제로부터의 가장 진실된 윤리적 거리를 가늠하는 영화이다(이는 <트라스-우스-몽투스>와 <아나>의 살아있는 주인공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실제로, <하이메>는 레이스 부부의 형식적이고 주제적인 관심이 핵심적으로 집약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슈톡하우젠의 불협화음, 텔레만의 미뉴에트, 폭발하듯 관통하는 루이 암스트롱의 “St. James Infirmary Blues”) 에서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대위법적 사용이 두드러지며 음악을 넘어 증언, 암송, 바람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강렬한 침묵 등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또한 영화의 보존주의자적 충동(페르난데스의 많은 드로잉은 그의 죽음 이후 파괴된다)은 코데이로의 고향, 트라스-우스-몽투스의 옅어지는 전통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뒤이은 영화들에서 더 깊어진다.

언덕과 강가에 둘러싸인 트라스-우스-몽투스(그 이름은 “산 너머”를 뜻한다)는 당시에는 포장된 도로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레이스 부부와 소수의 팀원들은 그들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며 마을에서 마을로 걸어 다녔다. 레이스는 “페르난데스의 역사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은 다른 것”이라고 말했고, <트라스-우스-몽투스>에 기록된 삶의 방식과 그 지역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구불구불한 언덕과 바위가 많은 절벽, 전기가 없는 돌집의 공동체, 몇 세대 동안 내려온 그들의 노동과 여가의 의식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영화가 과거의 무게를 불러 일으키듯, 그것은 또한 현재의 압박을 암시한다. 도시의 삶은 멀리 떨어진 추상이지만(카프카의 『만리장성(The Great Wall of China)』(1917)에서 발췌된 구절은 수도로부터 떨어진 사람들의 완전한 소외를 묘사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곳을 침식시키는 영향을 미친다. 대화는 부재한 가족의 구성원(생계를 이어가는 아버지, 결혼한 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마지막 장면은 떠나가는 열차로, 그것의 증기는 밤하늘 속으로 사라진다.     

<트라스-우스-몽투스>는 코르데이루와 레이스 영화의 핵심적인 역설을 잘 드러낸다. 그들은 구체적인 동시에 우주적인 것을, 응고된 시간과 미끄러지는 시간 모두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광대하고 영원한 편재의 감각이 있고, 한편으로는 팰림프세스처럼 과거와 현재가 합쳐지고, 삶의 흐름과 이야기의 흐름을 구분하는 것을 거부한다.

어떤 시점에서, 사실상 우리를 안내했었던 어린 소년들은 미래로 나아가며(그들은 그들의 자손들을 만난다), 또한 놀랍지 않게도 14세기의 왕실로 나아간다. 관찰된 현실은 신화의 영속하는 중얼거림과 동시에 일어난다. 어머니는 브랑카 플로 공주의 전설을 그녀의 자식들에게 들려주고, 중세 웨일즈의 「마피노기온」에 나오는 반대편 강가에 있는 검은 양과 흰 양에 대한 보이스-오버는 이 지역의 켈트 조상을 암시한다.

코데이로와 레이스는 코르데이루의 할머니가 자기 자신을 연기한 <아나>를 만들기 위해 80년대 중반 트라스-우스-몽투스로 돌아온다. <트라스-우스-몽투스>가 민족지적 픽션으로 분류된다면, <아나>는 양식화로 나아가는 국면이다. 다큐-우화, 또 어떤 때는 꿈과 같은 긴 통로를 지닌 트랜스 영화로 말이다. 이 부부의 가장 회화적인 작품 <아나> 는 광원이 하나인 실내와 태양이 작열하는 목초지, 밀밭을 오간다.

<트라스-우스-몽투스>와 함께, 관객의 마음은 하나의 영원에서 다른 영원으로 돌아다니게 된다. 올리베이라에 비견할 만한 아무데도 아닌 곳에의 기입에서, 인류학자인 아나의 아들은 청동기 시대 메소포타미아에까지 이르는 고대사 강의를 제공한다. 먼 옛날의 식(蝕)에 대한 아나의 기억은 한 여성의 잠식하는 황혼이 사물의 종말을 상징하는 영화에 출몰한다. 그러나 영화는 또한 어린 시절의 인상과 고양된 감각에 특권을 부여한다. 식에 대한 아나의 자세한 설명에서, 열병의 악몽에 관한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에서 가져온 빛나는 구절에서, 어두운 방 안에서 프리즘을 통해 햇빛을 굴절시키는 장면에서 말이다. (안토니오 레이스 & 마르가리다 코르데이루, 데니스 림, 아트포럼,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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